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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사람(6) 양선

성령의 사람(6) 양선 갈5:16-2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어릴적에 ‘연’을 날려본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연을 날리는 재미는 다른데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아이들의 연줄을 끊어 먹는 재미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연줄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연줄에다 유리를 깨서 가루를 만들어 풀을 매깁니다.

그리고는 서로 누가 이기나 시합을 합니다.

조용히 연만 날리면 좋을텐데 남의 연을 끊어 먹고 싶어 합니다.

 

‘딱지’를 쳐도 따먹기를 하고, ‘구슬’을 쳐도 따먹기를 합니다. ‘땅따먹기’ 하고, 무슨 놀이를 해도 평화롭게하는 것이 없습니다.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래야 재미를 느끼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골프를 쳐도 그냥 치지 않습니다. 1불이라도 걸어야 합니다.

뭘해도 평화롭게 하면 재미가 없나 봅니다.

 

평화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평화를 깨고 싶어 하는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항살 갈등과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런 악마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마음을 고백을 하면서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한탄을 한 것입니다.

 

인간은 ‘선과 악’의 두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은 오직 ‘선한 마음’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악’을 행한다고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선한일’이고 ‘사랑’입니다.

반대로 ‘사탄과 마귀’는 할수 있는 것이 ‘악한일’ 밖에 없습니다. ‘사탄’이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 우리 마음속에는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 두가지가 다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악한 것’에 대해서 그렇게 민감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악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지를 못했습니다.

‘악한 것’의 기준이 세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지를 못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는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악하것’을 보는 기준이 달라 졌습니다.

과거에 ‘악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악한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 과거에는 ‘악한 것’속에 있으면서도 ‘불편’한 것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는 불편하고 괴롭습니다.

저는 한국에 나가면 ‘동창’들의 모임에 초청을 받지만 나가지를 않습니다.

같이 있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제일 힘든 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세상적인 언어로 하는 대화를 듣는 것이 너무 힘든 것입니다.

‘술,담배’보다 ‘언어’가 우리의 ‘영혼’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악한 말’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고, ‘좋은 말’은 사람을 살릴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어두움’이 불편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과거에는 ‘어두움’에 익숙해 있었지만 ‘빛의 자녀’가 되고 나서는 ‘어두움’에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악한 것’을 완전히 벗어 버릴수는 없지만 ‘선’을 행하고자 하는 욕구가 더 커지게 됩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누구십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악한 것이 조금도 함께 할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 ‘악한 것’을 멀리하고 ‘선한 것’에 대한 더욱 더 강한 열망을 가지는 것이 오늘 여섯 번째 성령의 열매인 ‘양선’입니다.

 

‘양선’은 영어로 goodness입니다.

righteousness 와는 조금 다른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로워’ 집니다.

이것은 righteousness를 말합니다.

그런데 ‘양선’은 goodness입니다. ‘선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또한 선하십니다.

하나님에게 의로우심만 있다고 하면 우리는 정말 힘들어 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기에 우리 하나님은 한없이 좋으신 하나님이 될수 있습니다.

(시 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라는 고백을 할수 있습니다.

 

‘양선’은 ‘어질’ ‘양’에, ‘선할’ ‘선’입니다.

‘어질고 착하다’는 말입니다.

‘어질다’는 말은 ‘마음이 너그럽다’는 말입니다.

‘너그럽다’는 말은 ‘포용력, 이해력’이 크다는 말입니다.

“양선”이라는 말은 요즘은 익숙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 성령의 9가지 열매는 하나님의 성품이고 또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가져야 하는 성품입니다.

‘사랑’안에 모든 것이 포함되고 있지만 조금씩 구체적인 것들입니다.

‘양선’은 한마디로 ‘너그럽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그분 안에 있는 선하심을 ‘십자가’로 보여 주시고, 또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선함이 가득할 것”을 요구하며, 빛의 열매 혹은 성령의 열매로 이 “선함(착함)”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 자녀가 아버지를 닮듯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의 선함을 닮아야 합니다.

Like a father, Like a son 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 애비에 그 자식’이라는 말을 좋은 의미보다 나쁜 의미로 사용할때가 더 많지만,

우리 하나님은 ‘나쁜 것’이 하나도 없으신 ‘선하신’ 아버지 이십니다.

 

(시편 107편, 118편, 136편)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의 삶에서 성령의 열매로 흘러나오기를 원하십니다.

 

  •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양선은 단순히 착하게 사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양보하고 너그러우며 슬기롭고 행동을 바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 없는 사람들도 할수 있습니다.

 

성도의 “선함”은 반드시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연결이 되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선한 행동’속에 자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여 지게 됩니다

 

  • 다시 ‘연’ 이야기로 돌아 가서 이야기 하자면 연이 바람을 타고 올라가서 공중에 떠 있는 것은 지상에서 연줄을 잡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연’자체는 그렇게 높이 떠 있을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시간을 공중에 있을수도 없습니다.

줄을 놓아 버리면 더 높이 올라갈것 같지만, 줄을 놓는 그 순간에 연은 잠깐 올라가는 것 같지만 곧 땅에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면 더 높이 올라가고,

더 자유롭게 살것 같지만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줄이 끊어진 연 처럼 날아 오르다 곧 땅에 쳐 박혀 버리는 것입니다.

 

  •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이 있다면 ‘양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양심’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힘입니다.

지능과는 다른 것입니다.

 

‘양심’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고, 인간은 동물로부터 진화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아마 ‘진화론’을 주장하는 세상의 과학자들은 말하겠지요.. 인간은 짐승보다 ‘지능’이 높아서 ‘선과 악’을 구분할수 있는 ‘양심’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설명도 ‘궁색’하기 이를데 없다는 것을 본인들도 알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은 IQ가 높다고 해서 더 선한 양심을 가지는 것 아닌 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는 양심은 연의 줄과 같은 것입니다.

그 양심의 줄이 끊어져 버리면 인간은 자유로와 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비참해 지는 것입니다.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그동안 인류를 지탱해 왔던 이런 양심의 줄들이 하나 둘씩 끊어 지고 있습니다.

인간 사회에 재앙이 임하는 것은 그 시대가 인간의 근본인 양심의 줄이 다 끊어져 버렸을때 였습니다.

노아의 홍수때가 그랬고,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할때가 그랬습니다.

 

  • 지금 이 세상은 연줄이 끊어 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선과 악의 싸움에서 선한 마음들이 밀리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가 어려운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는 어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줄이 끊어 지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가 그대로 몰락해 버립니다.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문제만 볼것이 아니라,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더 큰 재앙의 파도를 볼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양심이 판단을 잃어 버리고, 도덕과 윤리가 깨어진 사회는 더 이상 발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악한 것이 지배하는 사회는 발전이 없습니다. 그곳에는 행복도 없습니다. 파괴와 멸망이 찾아 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악의 열매에 대해서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갈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런 육체의 유혹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길수 있는 장사는 없습니다.

삼손도 넘어 졌고, 다윗도 넘어졌습니다.

솔로몬도 넘어 졌습니다.

어느 누구도 장담을 할 수가 없는 것이 죄의 유혹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해야 되는 일은 사람들의 양심의 줄이 끊어 지지 않도록 하늘 일입니다. 악한 것이 선한 것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고, 그래야 좋은 세상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성도와 교회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 첫째, 성도는 세상 사람들 보다 의로워야 합니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주님이 ‘결단코’라고 하는 강한 용어를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연계해서 사용하신 경우는 딱 두 번입니다.

한 번은 이 본문이고, 다른 하나는 “너희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갈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결단코’ 라는 단어는 가장 강한 표현입니다.

절대 안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성경학자가 말하기를 “기독교는 절대로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적당하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세상을 살아도 되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주님이 가르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절대 쉬운 종교가 아닙니다.

대충 대충 넘어가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오래 참고 기다린다 뿐이지 결단코 잘못된 것을 허용하지 않으 시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외형적으로는 의로운 사람들 이었습니다

문제는 ‘마음’에 ‘자비와 사랑’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rightousness’를 추구했지만 ‘goodness’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추구했던 rightousness 도 위선적인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심하게 책망 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너희는 천국문앞에서 너희도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 ‘믿음’은 하나님은 선하시고 나에게는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부끄러운 죄인이고, 내 속에는 늘 죄의 용광로가 끓고 있고,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정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자신이 선하고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믿음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착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내가 특별히 잘못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나는 그래도 양심적이다.’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앞에 자신이 부끄러운 죄인인 것을 깨달아야 진정으로 착하고 선한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 ‘십자가’를 깨달을 때 ‘의와 선’ ‘Rightousness & Goodness’ 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십자가 안에서 자기 존재를 발견합니다.

나는 어떤 존재 입니까?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닮아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부름받은 존재인 것입니다.

이 세상을 밝히기 위해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우리의 존재의 의미인 것입니다.

 

선을 행할 때 자신의 존재의미도 찾게 되고,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선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행복이 아닙니다.

최고의 행복은 최고의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남을 행복하게 해 주려고 하는 사람이 자신도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남을 축복하는 사람이 자신이 복을 받게 되고

남을 평안하게 해주는 사람이 자신도 평안한 것입니다.

 

성도는 가장 선한 사람, 가장 양심적인 사람, 가장 정직한 사람, 가장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축복의 길이요, 행복의 길입니다.

 

(시 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하나님은 평생 우리에게 선하십니다.

우리를 악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선하게 인자하게 대하십니다.

 

  • 둘째, 선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넓은 마음,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악한 것과 타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악한 것과는 절대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의 차이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별할수 있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틀린 것’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 때문에 싸우는 일이 많습니다.

 

  •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다양하게 만드셨습니다.

제일 큰 차이는 ‘남자와 여자’입니다. 그리고 ‘혈액형’이 다릅니다. A형, B형, O형, AB형, Rh-형, 다릅니다.

‘기질과 취향’ 이 다릅니다.

진보적인 사람이 있고 보수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얼굴이 다른 것처럼 생각이 다릅니다.

 

‘다른 것’은 ‘불편함’을 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와 다른 것을 만날 때 ‘불편’을 느끼게 되고 ‘반발’을 하게 됩니다.

 

‘선한 사람’은 ‘열린마음,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적으로 틀린 것이 아니라면 이해하고 포용해야 합니다.

 

왜 우리 마음이 좁아지고 닫히는 것일 까요?

‘상처’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상처는 상대방 때문에 생기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상처도 있습니다.

스스로 오해하고 스스로 일방적으로 판단하여 상황을 왜곡하며 비정상적으로 이웃들에게 반응함으로 스스로 마음을 닫고 좁히는 경우들도 적지 않습니다.

 

동일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어떤사람은 긍정적으로 인생을 배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마음을 닫고 부정적이 되어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계속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마음을 넓히며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성경은 넓은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4:5)

 

넓은 마음은 거룩을 포기하는 세속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넓힌다고 하니까 어떤 분들은 진리와 비진리 혹은 거룩한 것과 불결한 것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을 생각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포스트모던의 시대는 진리와 비 진리, 거룩과 불결의 경계선을 허물고 모든 진리, 모든 도덕을 상대화시킨 시대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과거의 진리가 이제는 진리가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현재 미국의 교회들의 반 이상이 ‘동성연애’를 더 이상 ‘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잘못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잘못된 것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어둡습니다. 사탄과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은 언제나 잘못된 길로 가게 마련입니다.

그런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발해야 하는 것이 성도와 교회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어둠에 동화되어가고 있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구분이 안되는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양선’이라는 것은 단순히 모든 것을 두리 뭉실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통해서 의가 빛을 발하게 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선을 행해야 합니다.

포용하는 것을 넘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듯이 나의 유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서 내가 희생하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희생해야 자녀가 사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내가 희생할 때 다른 사람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그런 수고를 하신 것입니다.

 

고넬료 백부장은 이방인으로 처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눅7장)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로마 장교’는 유대인들에게는 나라를 빼앗은 원수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백부장을 좋게 말하고 있는 것은 그의 선행이 단순히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진심에서 우러 나오는 선행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행을 갚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소자에게 냉수 한그릇 대접한 것 까지 기억하신 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실천’은 초대교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 였습니다.

(히 10: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선한일의 시작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남을 먼저 생각해 주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을 해도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게 해야 하고, 봉사를 해도 내가 먼저 희생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쉬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똑 같습니다.

남을 먼저 배려해 주는 마음이 ‘선행’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매일 같이 선과 악이 싸우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선과 악이 있지만, 선의 지배를 받느냐, 악의 지배를 받느냐에 따라서 선한 일을 하기도 하고, 악한일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배우며 실천할수 있습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니라’ 하신 말씀처럼

매일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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