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사람(7) 충성

성령의 사람(6) 양선
December 30, 2023
성령의 사람(8) 온유
December 30, 2023
성령의 사람(6) 양선
December 30, 2023
성령의 사람(8) 온유
December 30, 2023

성령의 사람(7) 충성

성령의 사람(7) 충성 갈5:16-2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성령의 7번째 열매는 ‘충성’은 아마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서 ‘호감도’가 떨어지는 단어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충성’이라는 단어는 뭔가 강요를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요즘 시대에 제일 퇴색해 가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충성’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회사에서도, 사회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점점 찾아보기 어려운 그런 단어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충성’이라는 단어가 사회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이루는 단어 중에 하나 였습니다.

‘충성’하지 못하는 삶은 부끄러운 삶이요, ‘충성’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산업문명의 시대에 들어오면서 사회구조가 바뀌었습니다.

옛날 농경시대에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었습니다.

농사를 잘짓느냐 못짓느냐 하는 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성실하냐 성실하지 못하냐 하는 문제 였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오면서 부지런한 것 만으로 성공하지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남보다 뛰어난 기술이 있어야 하고, 정보가 필요하고, 행정력, 기획력, 추진력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의 종류도 다양하게 많아 졌습니다.

 

이런 시대속에서 오늘 성령의 7번째 열매인 ‘충성’은 매이기 싫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는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매력이 없는 단어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싫어 한다고 해서 인간의 근본 도리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몸이 아플때 쓴약이 필요한 것 처럼

‘충성’은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꼭 필요한 보약과도 같은 것입니다.

요즘처럼 인간의 근본 도리가 흔들리고 있는 시대에 더 필요한 것이 ‘충성’의 마음일 것입니다.

 

‘충성’은 모든 관계를 가장 튼튼하게 만들어 주는 가장 중요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충성’은 가장 중요합니다.

인간 관계에서 ‘충성’과 비슷한 단어는 ‘의리’일 것입니다.

 

  • ‘충성’ 이라고 하면 어떤 것이 머리에 떠 오르십니까?

아마 ‘군대’에서 하는 ‘거수경례’ 인사일 것입니다.

‘충성’은 ‘군대’에서 하는 제일 많이 사용하는 단어 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충성’이라고 하는 단어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조건적인 복종’ ‘죽음을 불사하는 복종’ 일 것입니다.

성경에도 (계2:10) 죽도록 충성하라… 죽음에 이르기 까지 믿음을 지키라…말씀합니다.

 

물론 ‘충성’이라는 단어의 의미속에는 ‘죽음을 불사하는 복종과 순종’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충성’은 그런 ‘강압적’인 의미의 말은 아닙니다.

 

  • ‘충성’이라는 말은 한글 사전에 ‘진정에서 우러나는 정성. 특히 국가나 임금에게 바치는 지극한 마음’ 이라고 정의 하고 있습니다.

 

  • 충성은 영어로 Faithfull 이라는 단어입니다.

Faith라는 단어와 Full이라는 단어의 합성입니다. Faith는 ‘믿음’ 이라는 의미이고, Full는 가득 차다라는 말입니다.

단어적인 의미로만 해석하면 ‘믿음이 가득차다’라는 의미입니다.

 

❶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기 때문에 모든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➋둘째는 사람에 대해서 믿을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믿을수 있고, 일을 맡겨도 믿을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faithful’ 이라는 말은 ‘성실하다. 진실하다. 변함이 없다. 믿을만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업적과 능력을 중요시 한다고 하더라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실하고 성실한 삶입니다.

특별히 신앙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충성스러워하고, 신실해야 합니다.

믿음직 해야 합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믿을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열매를 보아 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지내 보아야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사람을 고용할 때 먼저 있던 회사에서 어떻게 했는지, 나올때는 어떤 행동을 했는지 조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윗사람의 추천서를 받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충성스럽고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 하나님은 충성스러운 사람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마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딤전 3:11)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모든 일’에 충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열심히 하고, 그렇지 않으면 게을리 하고 그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분들을 많이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충성’이라는 것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내키지 않고 싫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해야 그것이 충성스러운 마음입니다.

 

‘요셉’은 구약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형’이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아버지 야곱에게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던 요셉이 ‘노예’라고 하는 끔찍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신을 팔아 넘긴 형들도 원망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주인인 보디발이 자신의 집안의 재산을 다 맡길 만큼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그런 자세가 ‘충성’스러운 자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은 한사람도 예외가 없이 충성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실한 마음이 없이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축복도 누릴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25장에 탈란트 비유를 통해서 ‘충성’이 어떤 것인지 비유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마 25:14-21)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주인은 먼길을 떠나며 종들을 불러 그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겼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주인이 맡겨 주었습니다.

주인의 것을 관리하는 관리자인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매니저인 것입니다.

청지기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맡았느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맡은 것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인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적게 받았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을까요?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맡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두달란트와 다섯달란트’ 받은 사람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배의 이문을 남겼습니다.

 

‘본전치기’만 하는 것은 칭찬을 받지 못합니다.

‘본전치기’가 어떤 것입니까?

‘내가 할것만 한다’하는 마음은 충성스러운 마음이 아닙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되지만 더 하는 마음이 충성스러운 마음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을 가리켜서 종말론적 신앙이라 말합니다. 종말론적 신앙이란 말은 세상이 끝난다 그래서 아우성을 치고 뭐 가정을 떠나고 직장을 등지고 산으로 올라가든지 기도원으로 올라간다든지 그것이 종말론적 신앙이 아닙니다.

 

종말론적 신앙의 본질은 언제나 역사 속에 다시 오실 수 있는 그 분, 그리고 역사를 마침내 심판하고 결산할 그 분 앞에서 언제 역사가 종말이 와도 내 개인의 종말이 언제 와도 그 분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준비되어져야 할 삶,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신앙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종말을 참으로 믿는다면 오늘 하루하루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야 할 우리의 삶의 내용입니다.

 

천국에 가면 우리의 허물은 모두 용서를 받지만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는 우리의 모든 삶에 대해서 댓가를 치루게 됩니다.

 

‘심은대로 거두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열매를 우리 자신이 거두게 되고, 그리고 자녀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오늘을 어떻게 사십니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의 일생에 한번 밖에 없는 날입니다.

영어로 ‘선물’이 present입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이 선물이고, 지금 이순간이 선물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겨주셨습니다.

시간도 맡겨 주시고, 돈도 맡겨 주시고, 재능도 맡겨 주시고, 은사도 맡겨 주시고, 또 우리의 몸도 맡겨 주시고, 우리의 목숨, 인생도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갖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맡겨 주신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건강한 몸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돈이 얼마나 많으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에게 맡겨진 돈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재능과 탈란트를 갖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 그 재능을 무엇을 위해서 사용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 ‘충성’에는 몇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는 작은 것부터 충성해야 합니다.

세상은 ‘큰 것’에 더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문화입니다. ‘크고 화려한 것’을 성공으로 생각하는 것이 세상의 문화요 가치입니다.

이런 세상속에 살고 있는 우리 역시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 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가치관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 것에도 충성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자기 아버지를 도와서 양을 칠 때 충성된 목자로 일했습니다. 그래서 그후에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었을 때 그 백성을 충성스럽게 다스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충성된 사람이 되려면 먼저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둘째는 끝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속담에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엇이나 맡아서 충성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이 얼마나 오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충성은 지내보아야 압니다.

처음에는 잘 할수 있습니다.

시작도 잘할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기백성을 사랑하시도 끝까지 사랑하셨다 했습니다.

 

올림픽경기에서도 마지막 까지 잘해야 메달을 따는 것입니다.

처음에 아무리 잘해도 마지막 까지 잘하지 못하면 그동안 잘한 것이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과거에 어떤분은 부서를 맡아서 봉사를 하셨는데 임기가 끝나기 한달을 남겨두고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무말 하지 않았습니다.

젊었을때는 ‘왜 그러십니까?’하고 설득을 하려고 했지만.. 나이가 들어 가면서 ‘설득’하는 것이 싫어 졌습니다.

‘설득’해서 들은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진정한 충성은 환경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옛글에도 나라가 어지러워질 때 충신을 안다고 했습니다.

충성스러운 마음, 신실한 마음이 언제 나타납니까? 어지러운 일이 일어나고 환난이 있고 핍박을 받을 때 나타납니다.

진정한 충성은 어려운 환경속에서 만들어 집니다.

열악한 환경속에서, 그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가운데 홀로 충성하는 것이 진정한 충성입니다. 보는 사람없어도, 알아주는 사람없고, 칭친하는 사람없어도 충성하는 것이 진정한 충성입니다.

 

그리고 생각도 못한 고난이 올 때 믿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일을 하려고 헌신을 했는데도 고난이 생기면 일시적으로 믿음이 혼란 스러워 지기도 하고 하나님이 원망스럽게 느껴 질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말씀하신 것처럼 ‘시험당할 때 피할길도 열어 주시고, 시험을 감당할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과거에 저와 같은 교회를 분들 가운데 주님을 위해서 헌신을 했지만 가족을 잃어 버리는 큰 아픔을 겪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시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과거에 같은 교회를 섬기셨던 어느 장로님은 나이가 50이 넘어 소명을 받고 평신도 선교사로 나가셨는데 사모님이 질병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그 다음해에는 30대의 젊은 딸이 아이를 낳다가 잘못되어서 하나님품으로 갔습니다. 저와 같이 신학교를 다녔던 충성된 여전도사님이었는데 그렇게 하나님앞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또 한분은 찬양대지휘를 하시던 분이었는데 이분도 50이 넘어 러시아로 선교를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대학에 다니던 아들이 요세미티에 캠핑을 갔다가 강물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습니다.

 

두분다 복음을 위해서 자신들이 하던 일을 접고 선교사로 헌신을 했는데 선교를 시작하기도 전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어 버리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선교지에 가셔서 끝까지 사역을 하셨습니다.

 

  • 충성의 마음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십자가의 은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나오는 마음인 것입니다..

 

과거에 로마의 바티간 뮤지엄에는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걸작품 ‘피에타'(pieta) 조각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그 시체를 끌어안고 비탄에 잠긴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지요.

그런데 여러해 전에 한 정신이상자가 이 위대한 조각상을 망치로 훼손하는 사고를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뮤지엄에서는 즉각적으로 복구 팀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은 회의를 통해 한 가지 흥미있는 합의를 했습니다. 그들은 바로 복구 작업에 들어가기보다 상당한 기간을 이 작품 앞에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매일 무너진 작품을 보고, 그리고 오리지널 그림을 보고–무너진 작품의 슬픔을 느끼고 그리고 회복되어야 할 원형의 형상을 마음에 새기면서–.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서 복원을 했다고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하는 충성은 진정한 충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행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의 충성스러운 이 마음은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줄도 모르고,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 인줄도 모르고 예수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교회를 없애는 일에 압장섰었습니다. 그런 큰 죄를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불러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일꾼으로 불러주신 것이 너무나 감사했었습니다.

 

(엡 3: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엡 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빚진자들입니다.

생명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도 다 갚을수 없는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있을 자리였지만 주님이 대신 해준것입니다.

 

저도 한인타운에서 40년 넘게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일터’이기 때문입니다.

 

한인타운이 살기 좋고 사역하기 좋은 곳이라서 이곳에 있었겠습니까?

 

저도 권총강도를 세 번만났습니다.

강도를 만나면 무섭고, 아이들 교육때문이라도 다른 곳으로 이사하고 싶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신기한 것은 권총강도가 나타나도 하나도 무섭지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엉겹결에 당해서 지갑을 빼앗겼지만 두 번째는 좀 여유가 생겨서 한마디를 했습니다. ‘야 너희들.. 내가 누군지 아냐? 나 목사야.. ’ 그랬더니 강도들이 놀래가지고.. Really?’ ‘Sure’ ‘Sorry’

히스페닉 강도는 ‘미안합니다’ 하고 도망가 버렸고,, 흑인강도는 그래도..성의를 봐서라도 시계라도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래서 차고 있던 시계를 벗어 주었더니.. 감사합니다.. 하고 갔습니다.

 

우리 교회도 지난 30년동안 많은 어려운 일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어렵게 생각했더라면 이 자리에 까지 올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오래 신앙생활하시는 분들도 우리 교회 문제가 없어서 오래 계셨겠습니까?

떠나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교회를 지키는 마음이 있기에 되는 것입니다.

 

금년이 저의 목회에 마지막해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목회’는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지만 저는 ‘기도’에 집중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로 돕는 일에 전력을 다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더 깊은 영성의 체험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교회가 많이 약해져 있지만 새로운 시대를 소망을 가지고 기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변화’는 사람들을 불안하게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발전’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생각은 완전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십니다.

‘기도’는 합력해서 선을 이룰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은 함께 하시고 도와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각자의 재능대로 끝까지 충성하시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