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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행진(3) 하나님의 사람

기도의 행진(3) 하나님의 사람 딤전6:11-12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옛날 군대에서 하던 이런 죠크가 있습니다.

중대장이 중대원들을 집합시켜놓고 물었습니다.

“야 여기 피아노 전공한 사람 누구야?”

“예 접니다.” “어느 대학 다녔냐?”

“한양음대 다녔습니다.” “거기 말고 서울대 음대 다닌놈 없냐?” “예, 접니다.”

“피아노 잘 다루냐?” “네, 그렇습니다.”

“너 강당에 가서 피아노 좀 옮기는것 도와 줘라.”

 

며칠 뒤 중대장이 다시 소대원을 소집했습니다.

“야 여기 미술 전공한 놈 누구냐?”

“예 접니다””어느 대학이냐?” “s대입니다.”

“너 그림 잘 그리냐?” “네, 잘 그립니다.”

“언제부터 그렸냐” “유치원때부터 그렸습니다”

“상받은것 있냐?” “예, 국전에 대상받았습니다”

“그래? 잘그리겠구나”

“그럼 족구시합하게 땅에 줄 좀 그려라!”

 

몇 일 뒤 다시 중대장이 소대원을 소집했습니다.

“야 너희들 검도 한 놈 없냐?” “예, 접니다.”

“몇 단이냐?” “2단입니다.” “그 정도가지고 안되 더 잘하는 놈 없냐?”

“예, 제가 좀했습니다.” “몇단이냐?”

“5단입니다.” “그래? 그럼 좀 하겠구나.”

“예, 조금합니다.” “그래 잘됐다 너 식당에 가서 김치 담그는데 파 좀 썰어라…”

 

요즘은 이런 죠크 정도는 ‘아재개그’라고 합니다.

 

그런데 죠크 같지만 군대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 입니다.

군대는 이렇게 무식한 곳이고 재미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모여서 군대이야기 시작했다 하면 날새는 줄 모르는 것입니다.

무식한 명령에도 ‘예’ 하고 즉시 순종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곳이 군대입니다.

 

군대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상식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군대는 군대의 길이 있듯이, 신앙생활은 신앙의 길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역시 세상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내 생각, 경험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각에 무조건 맞추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서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하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너 하나님의 사람’이란 말은 72번이상이 나오고 있습니다.

모세나 선지자들 처럼 하나님에게 택함받은 사람들에게 쓰여진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소유격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가장 영광스러운 칭호인 것입니다.

 

대통령의 사람이란 것은 대통령이 가장 아끼는 사람,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소유격에는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과 떼어 놓을수 없는 사람… 하나님과 하나인 사람…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신앙생활에 맞춥니다.

신앙생활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나의 생활은 거기에 맞추는 것입니다.

레이커스 선수들은 구단의 일정에 자신의 생활을 맞춥니다. 다저스 선수들은 구단의 일정에 자신의 생활을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선 맞추는것입니다.

 

첫째.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사야 41:8 “나의 종 너 이스라엘” 이라고 했고 44:1 “나의 종 야곱”이라고 했습니다.

종은 주인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주인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따라 주인을 섬기는 것이 종이 하는 일입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왕은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을 “나의 주, 나의 왕”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시편 145:1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왕이 하나님을 왕이라고 불렀다는 점입니다. 총리나 장관이나 백성이 하나님을 왕이라고 불렀다면 말이 됩니다만 왕이 하나님을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옛날 왕은 자신을 「짐」이라 불렀습니다.

왕은 자신을 최고로 높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진시황은 자신을 황제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왕들보다 더 높은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역사에 가장 위대한 왕이었지만, 하나님을 왕으로 모셨습니다.

자신이 왕 된것은 내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것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은 양치기 목동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왕의 자리에 앉혀준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면서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 이라고 소개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그의 삶이 존재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과 만족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소속감’이라고 합니다.

어디에 속했는가 하는 것이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지켜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순간부터 소속이 달라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 됩니다.

그분이 나를 다스리시고, 나를 보호하시고

나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이 계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이 실패할수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보다 어렵게 살수도 있습니다. 똑똑하지 못할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들보다 평안하고 행복할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시오,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의향을 알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고자 하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딤전 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의, 경건, 믿음, 사랑, 인내, 온유…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 모습입니다.

 

신약성경에 사도들이 쓴 서신들이 있습니다.

그 서신들은 크게 두 개의 단원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구원에 관한 교리들을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생활에 적용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활편에 핵심은 인격과 성품인 것입니다.

행함은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외모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분노하고 화내고 미워하는 것은 마귀를 닮은 것이고

성령의 성품을 가진 것은 하나님을 닮은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닮아 갈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가까워 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늘 기도하면서 주님과 교제를 해야 합니다.

 

부부도 오래 살면 서로 닮아 가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닮는 길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하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두여인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마르다는 봉사하는데 집중했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맛있는 음식대접해 주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겠습니까?

누가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자리에 까지 간것은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도 마리아 였습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그 말씀을 소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말씀을 오래 묵상할수도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형상을 닮아 갈수도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과 친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친한 사람들입니다.

이사야 41:8을 보면 “나의 벗 아브라함”이라고 했고 요한복음 11:11을 보면 나사로를 “친구”라고 했습니다.

벗이나 친구는 피를 나누진 않았지만 그 이상으로 친한 사이를 말합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천사 둘을 데리고 사람의 모습으로 방문하시고 대접도 받으시고 아브라함과 대화도 나누셨습니다.

구약성경을 통틀어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개인 집을 방문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경우가 최초였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아브라함과 친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약의 경우 예수님께서 자주 개인집을 찾아가신 것은 베다니에 살고 있던 나사로네 집이었습니다. 나사로를 친구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낯선 집 처음 가는 집은 어색하고 답답합니다. 은혜스러운 교회를 처음 찾아와 예배드린 사람들의 공통된 얘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롭다. 편하다. 낯설지 않다. 고향에 온 기분이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나는 누구와 친합니까?

하나님과 친하려고 노력합니까? 아니면 사람들과 친하려고 노력합니까?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 두렵습니까?

아니면 사람과 멀어지는 것이 두렵습니까?

 

에베소서 6:24 말씀처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해야”합니다.

 

주님의 친밀한 친구가 됩시다.

‘절친’이 되어야 합니다

친구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 친구 도리입니다. 친구를 높이고 돕는 것이 친구가 할 일입니다.

 

주님은 친구인 나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 친밀해 지려면 시간을 같이 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하고, 또 기도를 통해서 주님과 대화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딤전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믿음의 삶이란 싸움입니다. 죄와의 싸움입니다.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싸움도 악한 싸움이 있고 선한 싸움이 있습니다. 세상의 싸움은 악한 싸움입니다.

 

미국이 세상 모든 일에 끼어 들어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운다.

평화를 위해서 싸운다고 하지만 그대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의 싸움은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한 싸움들입니다.

믿음의 싸움만이 선한 싸움입니다.

교회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는곳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고, 세상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중보기도’는 선한 싸움입니다.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선한싸움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전쟁에서 기도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기도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미국에 있습니까? 요즘 한참 기세가 오르고 있는 중국에 소망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 어느 나라에 소망이 있습니까?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소망이시오 힘이신 것입니다.

 

성도는 땅에서 기어 다니면서 살면 비참해 지는 것입니다. 기도의 날개를 펴고 날라 올라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힘을 합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혼자 조용히 해야 더 좋습니다.

큐티할때는 아무도 방해받지 않는 곳에서 해야 합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위해서 혼자기도해야 좋을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싸움에서는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최초로 성령이 강림하실때도 120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도는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함께 기도할 때 기도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제일 야속한 생각이 듭니다.

 

중보기도는 혼자서 할수 있지만 또한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리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이 살아나기 위해서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기도의 날개를 펼때 만이 위대한 힘을 가지게 됩니다. 하늘을 날며 세상을 이기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의 문이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찢어졌습니다.

그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를 막고 있던 휘장입니다.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던 곳입니다.

 

그런데 그 휘장이 찢어 지면서 누구나 하나님앞에 나올수 있도록 열어 주셨습니다.

누구에게 열어주신 것이겠습니까? 기도하러 나오는 사람에게 열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가서 언제나 기도할 수 있는 기도의 은총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축복인 것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기도의 간절한 갈망을 가질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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