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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2) 애통하는 사람의 행복

애통하는 사람의 행복 마5:1-10

①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②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③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④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⑤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⑥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⑦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⑧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희랍의 전설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여자가 자기의 삶을 마치고 사후 세계로 가기 위해서 요단 강가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그 여자는 한 천사를 만나게 됩니다.

천사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는 이 강을 건너기전에 계곡의 샘물을 마시겠습니까?”

여인은 묻습니다. “내가 그 샘물을 마셔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자 천사는 “만약 그대가 샘물을 마시면 세상에 모든 것을 잊고, 이 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여인은 “나에게 그 샘물을 주십시오. 나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고통을 다 잊고 싶습니다.” “허나 여인이여, 그대는 동시에 모든 기쁨도 잊게 될 것입니다.” 여인은 말하기를 “나는 이 세상 모든 상처와 실패를 망각하고 싶습니다.”

천사가 다시 말합니다. “여인이여 하지만 그대는 동시에 사랑도 잊어버릴 것입니다.”

그러자 한참을 생각하던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 샘물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이 여인은 인생의 마지막 순례의 정점에서 기쁨은 고통을 동반하고, 성공은 실패를 수반하며, 사랑은 상처를 동반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두 번째 말씀인 애통하는 것은 행복한 것과는 전혀 맞지 않는 말 같아 보입니다.

‘애통’과 ‘행복’은 함께 동시에 있을수 있는 감정의 상태가 아닌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같이 존재 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애통과 행복은 같이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두가지 단어를 같이 쓰고 있고,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와일드 라는 분은 “애통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정서요, 모든 예술의 전형이요, 시금석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애통’이란 단어의 원어적인 의미는 대단히 의미 심장합니다.

‘단장(斷腸)’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슬픔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슬픔, 가슴이 찢어지고 숨이 막히며 온 몸과 마음이 떨리며 뼈까지 쑤시는 고통을 느끼는 슬픔과 애통, 그런 애통을 ‘단장’이라고 합니다.

 

중국의 진나라때 왕이 배로 강을 따라서 여행을 가는 그런 때의 일입니다. 수행하던 부하 한 사람이 원숭이 새끼를 붙잡아 배로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어미 원숭이가 뒤를 쫓아왔는데 배가 강사이를 떠내려가자 이 어미 원숭이가 그 강언덕을 따라서 슬피 울며 계속 따라오는 것입니다.

어미 원숭이는 나무, 가시밭 언덕을 헤치고 끝까지 쫓아오면서 우는 것입니다.

배가 언덕에 가까이 이르자 어미 원숭이는 뻘쩍 뛰어 배에 올랐는데, 그대로 절명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도 이상해서 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았더니 너무나 심한 애통과 아타까움 때문에 창자가 가닥가닥 끊겨져 있더라고 합니다.

이로부터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단장(斷腸)’에 비유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옛날 가요 가운데 ‘단장의 미아리고개’란 노래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미아리 눈물 고개 임이 넘던 이별 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삿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한국전쟁 그 격동기에 가족들 앞에서 북으로 끌려가는 남편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아내의 애절한 한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슬픔과 애통의 미아리 고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단장(斷腸’)의 더 깊은 뜻은 누구로부터 고통을 당해서 애통하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슬픔’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어떤 중요한 것이 없음을 인해서 창자가 끊어지도록 애통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인격이 있어야 마땅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어야 마땅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이 있어야 마땅 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마땅히 있어야 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들이 우리 안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면서 창자가 끊어지도록 애통하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죄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없어야 할 교만과 자만이, 없어야 할 미움과 시기, 질투, 욕심이 불순종과 불신앙이 뱀처럼 뙤아리를 틀고 있기 때문에 창자가 끊어지는 애통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사기를 당하고, 배신당해서, 치욕을 당했기 때문에 억울해서 분해서 단장의 애통을 하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소유하지 못하는 좌절과 절망에서 애통해 하는 것은 그런 애통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애통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깨달으라는 의미입니다.

 

시51편에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생각하며 애통해 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한 자신의 잘못을 보면서 주께 돌아가기를 열망하며 애통해 합니다.

당연히 고통을 느끼고 마음에 애통해야 할 사람이 아무런 의식이 없이 히히덕 거리고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애통은 죄에 대한 애통, 내면적인 자신의 모습을 보고 슬퍼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 때문에 애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참된 애통은 하나님앞으로 인도합니다.

진정한 애통은 믿음의 성숙으로 인도합니다.

참된 애통은 한 두 번 슬퍼하며 회개했다고 해서 끝난는 단회적인 애통이 아닙니다.

애통은 날이면 날마다 자신을 꾸짖고 깨뜨리는 아픔의 눈물입니다.

 

참된 애통은 신앙이 깊어질수록 죄의 문제에 대하여 더욱 민감해지고 날마다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봅니다.

더 이상 오만할 수가 없습니다.

항상 마음이 가난해 집니다.

 

참된 애통은 자신의 모습에 애통해 하던 사람들이 점점 성숙되면서 이제는 다른 사람, 가족과 친척, 이웃, 민족을 보고 애통해 합니다.

 

민족의 상처를 부여잡고 눈물 흘리게 합니다.

불신앙과 죄에 사로 잡혀 있는 가족과 친척 이웃의 영혼을 붙들고 눈물로 기도하며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참된 애통은 이 땅의 일보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우선하게 합니다.

참된 애통은 전도와 선교의 현장으로 달려가게 합니다.

 

참된 애통은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아픔을 느끼며 함께 울도록 합니다.

참된 애통은 선교와 봉사와 사명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이렇게 애통해하고 눈물 흘릴 때 그때서부터 인생의 깊이를 느끼게 됩니다.

뼈아픈 인생의 애통이 인생의 인생 됨을 찾게 합니다.

 

애통해 하며 죄와 영혼을 위한 눈물을 흘릴 때 비로소 헛된 누더기 같은 인생의 껍데기를 벗을 수 있습니다.

애통의 순간만이 진실을 찾게 합니다.

자신을 찾게 합니다. 친구를 얻는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을 받게 합니다.

 

청교도 시대에 설교자였던 Thomas Watson은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지 않고는 낙원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역설적인 고백을 들려줍니다

(롬 5:20)”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죄를 깨달을수록, 아파할수록, 애통할수록 은혜가 더욱 충만해진다는 체험적인 고백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눈물의 사람들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가장 많이 울었던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는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요를 적셨고(시 6:6),

또 그의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될 만큼 눈물 많은 인생을 살았습니다(시 42:3).

 

가장 깊이 울었던 사람은 바울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의 적나라한 진면목을 보게 됩니다. 그는 자기 속에 선한 마음은 있으나, 행동이 따라주지 못하기에 가슴속으로 애태우며 눈물짓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마음의 원함과 실제 사이의 심각한 갈등과 모순을 통감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가장 크게 울었던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그는 실수가 많기는 했으나 순박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얼떨결에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는 곧바로 대문 밖에 나가서 대성통곡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눅 22:62).

 

이처럼 그렇게도 많이 울고, 가슴 아프게 울고, 크게 울었던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게 살았음을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들은 뼈저리게 울었는데도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가슴에서 나오는 깊은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애통함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분노의 울음은 있어도 자신의 죄와 허물을 인한 눈물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의 원수는 바로 내 속에 있습니다.

싸워야 하고, 이겨야 하고, 정복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갈등과 투쟁 속에서 자신의 무능함과 무력함에 애통하는 사람이 행복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애통의 체험이야말로 자신이 깨어지는 체험입니다

♬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할맘 충만하게 합소서

예수여 비오니 나의 기도 들으사

애통하며 회개할맘 충만하게 합소서

 

♬어린양 예수 내 죄를 담당하사 원수들의 채찍에

온몸 찢기셨네, 외로움과 슬픔 홀로 담당하사

아버지의 노여움 날 위해 받으셨네

아프고도 쓰린 눈물 홀로 흘린 주님이여

주님죽인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순간마다 내 속에 있는 죄성을 아파하며 탄식할수록 위로의 성령님께서 곁에 오셔서 쓰다듬어 주실 줄 믿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이런 체험을 들려줍니다.

“나는 죄를 깨달을수록 점점 더 비참해졌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주님은 나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 오셨습니다.”

거룩한 아픔에 거룩한 기쁨을 주십니다.

 

진정한 행복은 달콤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쓰디쓴 쓴맛에서 나온다는 것이 오늘 성경의 가르침 이십니다.

 

애통하는 사람의 행복을 가질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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