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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5) 긍휼한 사람의 행복

긍휼한 사람의 행복 마5:3-7

①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②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③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④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⑤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⑥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⑦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⑧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오늘 말씀은 팔복의 다섯 번째 말씀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내부는 두 개의 방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입니다.

‘성소’에는 ‘금촛대, 떡상, 금향단’이 있고 이곳에는 제사장들이 매일 들어갑니다.

그리고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법괘’가 있습니다.

법괘안에는 십계명과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습니다.

그 법궤 앙편에는 천사가 두 날개로 덮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해마다 한번씩 제물의 피가 뿌려졌습니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번 7월10일 대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모든 사람들의 죄를 사함 받고 나왔습니다.

우리는 이곳을 ‘속죄소’라고 부릅니다.

 

‘지성소’는 모든 죄를 사함 받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베풀어지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이 곳을『시은소』(Mercy seat)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긍휼’이라는 말은 ‘영어로 mercy’ 라고 합니다.

‘불쌍히 여긴다, 용서해 준다’ 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 때문입니다.

어떤 행위나 선행으로도 용서 받을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 가운데 태어나고, ‘죄’속에 살아 갑니다.

‘죄’는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고, 우리의 삶에 각종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삯은 사망이요 영벌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죄’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인간의 삶은 처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땅에서도 비참하게 살고 죽어서는 지옥이라고 하는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됩니다.

 

이런 죄의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용서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값을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시고, 인간의 모든 죄를 하나님이신 그 분이 자기 몸에 다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사건이 생겨난 것입니다.

 

  • ‘죄’를 용서 받고 구원 받을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긍휼’이라는 말이 ‘500번’ 이상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그만큼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살수 없는 연약한 존재 인것을 아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강한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사람이 강한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믿음이 좋은 자라고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그런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유대 지역을 떠나 지중해의 북부 도시 시리아 쪽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시돈’이라는 동네에 들어 서자 어떤 가나안 여인이 큰소리를 지르며 예수님께 찾아와 간곡한 부탁을 합니다.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 큰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니 제발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이 여인은 더 애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을 떠보시려고 나는 오직 이스라엘만을 위해서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고는 자기를 도와 달라고 간곡히 호소합니다.

이만하면 예수님도 마음이 동하실만한데, 이제는 한 수 더 떠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먹을 것이 있으면 자녀한테 주지, 개에게 주겠느냐?”

그러자 이 여인은 참 감동적인 말을 합니다.

“주님 말씀이 백 번 옳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 먹잖아요!”

우리 예수께서 얼마나 큰 감동을 받으셨는지 이렇게 극찬하십니다.

『여인이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도다』

 

하나님의 긍휼이라면 부스러기라도 충분하오니 불쌍히 여겨 달라는 믿음인 것입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자신이 불쌍한 존재인 것을 모르는 것이 교만입니다.

반대로 ‘겸손’은 자신이 불쌍한 존재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살수 없는 불쌍한 존재인 것을 자각하고 깨닫는 것이 겸손인 것입니다.

 

소경 바디메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있는 힘을 다해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돌아 섰습니다.

그리고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누구에게 긍휼을 베푸십니까?

자신이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주님께 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어떤 축복이 필요한 것입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것을 믿으십니까?

매일 매일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호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자기가 체험한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출 34:6)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오늘 우리가 이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 때문 인줄 믿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힘입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엄청난 긍휼에 빚진 자입니다.

그 풍성한 긍휼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하나님의 가슴을 가지고 긍휼을 베푸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긍휼이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곧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너무 안타깝게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 9:23)”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보실 때 그가 잘 살든지 못 살든지, 그가 귀족이든지 천민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이 없는 인생을 살면 그들을 심히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까?

목자가 없어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뿔뿔이 흩어져 헤매이며 고생하는 양처럼 보이신다고 합니다.

목자없는 양은 사나운 짐승들의 쉬운 먹이감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면 그 끝은 심판이요 멸망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불행한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예수님의 긍휼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솟아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면 무엇합니까?

이 세상에서 출세하면 무엇합니까?

남보다 건강해서 몇 년 더 살면 무엇합니까?

결국은 구원받느냐 구원받지 못하느냐가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지옥의 형벌로 향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보다 불행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 영혼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그런 영혼 사랑이 필요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 대하여 이렇게 호소합니다.

“우리가 영혼이 떠난 육신의 죽음을 앞에 놓고 통곡을 한다면, 하나님을 떠난 영혼의 죽음을 놓고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도전을 받아야 할 말이 아니겠습니까?

교회 빈자리 채운다는 그런 마음 보다, 하나님을 떠나 비참한 가운데 살고 있는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그런 긍휼의 마음을 가질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고통 당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인간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출산의 고통가운데 태어나서 고통가운데 살아가다 고통가운데 죽는 존재입니다.

고통없이 사는 인간은 식물인간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말을 배우기 전에 우는것부터 배웁니다.

‘울음’이 인간의 언어입니다. 아이들은 ‘울음’으로 자신의 모든 의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그 고통을 체휼하셨습니다.

가장 큰 고통을 체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고통의 크기와 깊이를 아시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 보다 더 큰 고통속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불치의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 지체의 장애를 가지고 고통받는 사람,,,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

세상에서 버림받고 천대받는 사람들, 천재지변, 전쟁으로 고통을 받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의 실패와 갈등으로 고통받는 받습니다.

 

그래서 사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고통 당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민망히 여기셨다, 측은히 여기셨다, 안타깝게 여기셨다, 때로는 아픈 가슴으로 함께 우셨던 장면들을 자주 묘사합니다.

‘죄’로 인해서 이런 고통속에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의 가슴에는 긍휼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긍휼’이라는 말의 어원적 뜻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생각, 그의 감정, 그의 처지와 형편 속에 동참하면서 사랑을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로빈슨’이라는 사람은 ‘긍휼’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긍휼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느끼며, 그들의 피부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입장과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이다.”

 

그 사람의 처지에서 가슴 아파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느껴보며, 그 사람과 똑같은 형편에 처해보는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입장이 되어보시려고 연약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의 완벽한 표출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아픔과 고통에 직접 동참하고 계십니다.

아픈 자의 상처를 사랑의 손으로 싸매 주시고, 눈물을 닦아주시며, 멍든 가슴을 어루만져 주시고, 치료해 주시며, 애절한 심정으로 민망히 여겨주시며 측은히 여겨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이런 긍휼의 가슴을 품어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사랑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합니다.

첫째는 위쪽으로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나보다 높은 분에게 대하는 사랑으로, 이것은 존경을 겸한 사랑으로 부모를 존경하거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랑입니다.

 

둘째는 나와 같은 위치에서 동등하게 대하는 사랑으로 형제, 친구, 동료,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셋째는 나 보다 못한 사람, 나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대한 사랑입니다. 이것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9: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우리 주변에는 뜻밖의 고통을 당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이 필요합니다.

다정한 손으로 붙잡아주는 것이 기다려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눈높이를 조금 만 낮추고 주변을 살펴보면 긍휼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심판의 눈으로 보지 않고, 사랑과 긍휼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셋째.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긍휼의 본질은 ‘용서’입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왔습니다.

세상에서도 법을 어기며 마음대로 행동을 하면 잡혀서 감옥에 가게 됩니다. 자신을 나아준 부모를 거역하고, 가정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욕을 먹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고 이땅에 태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끊임없이 짐승을 닮아 가려고 했습니다.

원숭이가 자기 조상이라고 끝까지 우겨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던 인간과 원숭이를 연관시켜 보려고 끼워 맞추기를 하고 있습니다.

불순종에다 패역에다, 망나니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돌이키기 위해서 선지자들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그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계속 죽였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냈습니다.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파괴하고자 하는 사탄에게 속아서 그러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패역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깨닫지도 못하는 인간을 대신해서 독생자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인 것입니다.

우리가 깨닫기 전에 이미 먼저 용서해 준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요, 긍휼인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에 앞장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죄인중에 괴수였습니다. 이런 바울을 하나님은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삼아 주셨습니다.

 

바울은 용서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사람답게 이렇게 말합니다

(골 3:13-14)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 John Stott 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얻을 수 없으며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가 죄를 회개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우리가 용서받았다는 것만큼 우리에게 남을 용서할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용서가 잘 안 된다면 혹시 내가 죄를 깊이 회개하는 체험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일만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용서받은 것이 얼마나 큰 은혜를 입은 것이고, 남을 용서해 주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나의 죄를 진정으로 깨닫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잘못은 나의 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 줄수 있습니다.

그리고 긍휼의 마음을 가질수 있습니다.

 

긍휼의 마음을 가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계속해서 긍휼의 은혜를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긍휼의 축복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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