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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6) 마음이 깨끗한 사람의 행복

마음이 깨끗한 사람의 행복 마5:3-8
①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②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③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④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⑤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⑥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⑦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⑧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이번에 그랜드캐년에서 ‘스카이워크’가 오픈이 되었습니다.
그랜드캐년은 세계 7대 불가사의중에 하나이고, 계곡의 길이가 장장 227마일입니다.
거의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입니다.
미국의 국립공원가운데 사람들이 제일 많이 찾아 가는 곳입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손님이 오면 제일 먼저 모시고 가는 코스 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스카이워크’라는 설치물을 만들었습니다.
그전에는 계곡위에서 보아야 했지만 이제는 그 계곡 공중위로 유리로 만든 난간이 만들어 졌습니다.
공중에 떠서 그랜드캐년의 볼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닥에서부터 1200미터 높이이고 21미터 공중으로 뻗어 나가게 됩니다.
공중으로 걸어서 그랜드캐년의 밑을 볼수 있는 것입니다.

그랜드캐년에 몇 번을 다녀왔지만 갈때마다 느끼는 것은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LA에서 운전하고 가면 8시간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도착해서는 차에서 내려서 그 엄청난 광경을 보면 ‘와..’ 탄성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는 왔다는 기념으로 증명사진을 찍습니다.
기껏 오래 있어야 30분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나와야 합니다.
‘와’ 한번 탄성을 내기 위해서 하루 종일 차를 타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허무하고 아쉬운 생각이 늘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쉬웠든지 그랜드 캐년의 계곡을 좀더 깊이 볼수 있게 ‘스카이 워크’를 만든 것입니다.
사람들은 25불을 내고 25미터 앞으로 더 나가서 내려다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성에 안차게 되면 조랑말을 타고 계곡에 내려갑니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헬리콥터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서, 그리고 콜로라도강을 배를 타고 즐기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스카이 워크를 만들고, 헬리콥터를 타고 굳이 그 밑에 까지 내려가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그랜드 캐년을 좀 더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냥 위에서 보고 와 한번 탄성을 지르기 보다는 좀 더 가까이 가서 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인 것입니다.

1972년 라이프 잡지에 ‘존 고다드’라는 47세의 남자를 주제로 한 기사가 실려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한 남자의 후회없는삶? 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는데 그 기사로 인해서 라이프잡지는 사상 최고의 판매부수를 기록 할 수 있었다.
존 고다드는 1940년 자신이 15살될 때에 자신이 평생에 꼭 하고 싶은 것 즉 인생의 꿈들을 수첩에 127가지를 적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47세 때 103개를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죤 고다드씨의 꿈은 세계의 아름다운 곳을 다 보고 싶어하는 것이었고, 30년 만에 그의 꿈의 대부분을 이루었습니다.
요즘은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그때만해도 그것은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보고 싶어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공통된 욕망일 것입니다. 형편이 안되서 그렇지 형편만 되면 세계를 일주하고 구석구석을 다 보고 싶은 것입니다.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라도 가서 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세상의 곳곳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싶어 하는 것 보다 사실 더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렇게 다양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이 세상보다 더 위대한 것은 이 세상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분은 세상만물보다 억만배 더 위대한 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이렇게 엄청난 우주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셨을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궁굼증을 더 가지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에 눈을 뜨는 동기가 여러 가지 이지만,
저는 처음 교회에 나와서 ‘창조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나오기 전에는 ‘창조’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습니다.
학교에서 진화론을 배운대로 세상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고, 이 세상의 모든 생명들체은 저절로 진화된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라고 배웠습니다.
그것이 과학이라고 생각하고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와서 창조에 대한 말을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종교적인 이야기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닌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창조론과 진화론을 비교해서 생각해 보아도 진화론이 틀린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으로 사서 본 책이 ‘창조와 과학’이라는 책이었습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진화는 억지로 만들어낸 상상일 뿐이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이렇게 많은 생명체들이 저절로 만들어 지고, 생명체들이 살수 있게 완벽하게 환경이 만들어 지고,
해와 달과 별이 수천년동안 먼지만큼의 오차도 없이 움직여 지는 것이 저절로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창조주 하나님이 계셔서 그 분이 만드셨다고 믿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어마어마한 우주와 세상은 누가 만들었는가?
그 창조주는 얼마나 위대한 분일까?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나니 그 다음부터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 였습니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성경의 이 한마디를 믿으면 그 다음에는 마지막 까지 그냥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우주와 세계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집니다.
우주에 허블 망원경을 띄워 놓고 우주의 더 먼곳을 더 깊은 곳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 우주를 만드신 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창세기 1:1 절을 믿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가 있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냥 우연히 생겨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창조주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우연히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는 다고 하면 이야기는 다른 것입니다.
이 오묘한 세상을 보는 것 만해도 감탄이 저절로 나는데, 이것을 만드신 분은 얼마나 위대 하실까?
그 분을 보고 싶어 할 것입니다.

헤리포터라는 영화를 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주인공을 직접만나 볼수가 있다면 그것은 더 좋은 것입니다.
헤리포터를 건성으로 보는 사람은 영화를 보는 것을 만족하겠지만 헤리포터를 진짜 좋아하는 펜은 그 작가나 주인공의 집에 진을 치고서라도 직접 만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잘라서 팬클럽을 만들 것입니다.
손 한번 잡아 보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나를 이 세상 모든 것 보다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믿는다면 이야기는 더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보고 싶은 것입니다. 보고 또 보고,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은 것입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것입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세상적인 표현으로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팬 클럽이 아니겠습니까?
예사모=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주사모=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주님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모임, 그것이 교회공동체인 것입니다.

요즘은 예수를 믿던 안 믿던 일단 교회에 다니면서, 때가 되면 은혜를 받게 하지만, 원래 교회의 모습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믿은 사람들의 공동체,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예수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직분을 받기도 하고, 예수에 대해서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그들을 배려해야 하고, 기다려야 하고, 그러다가 교회는 수많은 문제 속에 빠지게 되고, 진작해야하는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는 관심도 없게 되는 일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주님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주님을 알지 못하든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될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만나기를 소원하고, 주님을 보기를 소원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성도들은 만날때마다 인사가 ‘마라나타’ 였습니다‘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주님 보고 싶습니다.’
얼마나 주님을 사모했으면, 인사가 ‘마라나타’ 였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조금 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팬’이 아닙니까?
우리는 ‘팬’정도가 아니라,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원토록 동거동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분이 내안에 있고, 내가 그분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면 우리 주님 옆에서 영원히 그분과 함께 있을수 있습니다.
영원히 주님의 보습을 보면서 살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 갈 때는 주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해야 주님을 볼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는것 그것이 복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에게서 모든 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 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아, 그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을 볼수 있는 것은 마음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 하는데 달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청결해야 할 대상을 많은 몸의 지체 중에서 유독 “마음” 에다 두셨습니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부분인 ‘영혼’을 청결하게 하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혹은 네 ‘몸’을 청결히 하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을 청결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특별히 “마음”을 청결케 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심은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마음은 신앙의 중심 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근본은 교리체제나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마음 상태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6:5)고 말씀했습니다.
이는 곧 우리 신앙의 모든 것이 “마음”에서부터 시작됨을 증거해 주는 가장 분명한 말씀인 것입니다.

’마음‘은 모든 행동 동기와 인격의 중심이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행위의 동기를 유발하는 인격의 중심부인 것입니다. ’마음‘에 무엇을 생각하고 게획 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행동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행복‘을 주실 때, 바로 주시지 않고 천사에게 맡기면서 ‘너희가 갖다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천사들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너무 행복해지는 것이 시샘이 나서, 그 행복을 숨겨두기로 했습니다.
한 천사가 ‘바다 깊은 곳에 숨겨둘까?’ 했더니, 다른 천사가 말하기를 ‘그건 안되지. 사람들은 재주가 많아서 바다 속 깊은 곳까지 내려가 찾아내고 말 거야.’
‘그럼 아주 높은 산꼭대기에 감춰 놓을까?’ ‘그것도 안돼. 사람들은 모험심이 많아서 거기까지 올라가 행복을 찾아 낼 거야.’
한참 고심하던 한 천사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했습니다.
“사람이란 제 머리만 믿고, 제 재주만 믿어 자만하기 쉽지. 그러니 자신들과 가장 가까운 마음에다 행복을 숨겨 두면 못 찾을 거야.”
그랬더니 사람들은 정말 어리석게도 자기 마음 속에 있는 행복을 찾지 못한 체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Being Happy’ 라고 하는 책을 써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분이 있습니다.
‘앤드류 매튜’라고 하는 분입니다. 일약 세계적인 작가가 되고 4개 대륙에서 500여 TV,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게 됩니다.
그 후에 ‘Follow Your Heart’ 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앤드류 매튜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다.’라고 합니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꾸는 것은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청결”이란 말의 의미
원래 청결이란 말은 <카다로스>인데 이는다음과 같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깨끗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카다로스>라는 헬라말은 더러운 옷을 세탁하였을 때 사용되는 말로 ‘깨끗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러웠지만 씻어서 깨끗해진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세상의 죄악으로 마음이 더러웠지만 주님의 보혈로 씻음을 받고 깨끗해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청결하다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숙한 마음이 아닙니다.
청결하다는 것은 순해빠져서 아무것도 거절하지 못하는 약한 마음도 아닙니다.
청결하다는 것은 거짓없고, 순수하고, 정직하다는 그런 것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꾸어 지는 것입니다.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5)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이어서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은 겸손의 마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을수 있는 그런 자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낮아 지셔서 제일 천한 자리에 까지 낮아 지셨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잘라 죄인들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 를 지셨습니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섬김과 희생의 마음이 청결한 마음인 것입니다.

둘째,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주석가 Barclay는 타작 마당에서 곡식을 키질 하고 채로 쳐서 모든 죽정이를 제거한 곡식을 말할 때나, 전쟁에 나가려고 군사를 모집할 때 무능력한 군사들을 다 빼버리고 정예된 용사를 일컬을 때, <카다로스>를 쓴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의미 있는 말로 성도가 <일편단심>하나님만을 사랑하고 따르는 신앙 자세를 말합니다.
어려움이 왔다고 흔들리거나, 시험이 왔을 때 흔들리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경고하기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 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야고보서 1:6-8)고 하였습니다.

믿는 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 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는 다는 말입니다.
사람 때문에 흔들리고, 환경 때문에 흔들리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봉사하는 것도, 희생하는 것도 주님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세우실 때,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여호수아 1:7)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하셨겠는가? 주를 따르는 마음이 약해져서 세상과 타협하고, 어려움이 왔을 때 낙심하고 시험에 드는 어리석은 자가 될까? 염려 하셨기 때문인 것이다.

셋째, 청결한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워진 마음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할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무엇으로 채우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름다운 것으로 채울수도 있고, 추하고 어두운 것을 채울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무엇으로 채우는가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몫입니다.

새로운 집에 이사를 하면 주인의 취향에 따라서 가구를 가져다 놓습니다.
주인의 취향에 따라서 장식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마루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카펫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의 취향에 따라서 방을 장식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롬 8:5-6)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인간의 마음이 언제가 가장 아릅답겠습니까?
사랑으로 가득차 있을 때입니다.

최고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왜 최고 입니까?
왜 생명의 종교이겠습니까?
최고의 사랑, 영적인 사랑, 영원한 사랑을 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사랑입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에너지와 생명을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악하게 만듭니다.
세상은 우리를 힘들게 만듭니다.
갈수록 메말라가는 우리의 마음을 살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최고의 관심사가 물질입니다.
경제가 회복이 되면 모든 것이 좋아 질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 사회의 문제가 물질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의 가슴을 살리고 생명을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의 가정을 살리고, 우리의 교회를 살리고
이 세상을 살리는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잘 경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아가페의 사랑, 참 사랑, 위로부터 주시는 거룩한 사랑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의 행복 마5:3-8
①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②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③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④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⑤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⑥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⑦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⑧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이번에 그랜드캐년에서 ‘스카이워크’가 오픈이 되었습니다.
그랜드캐년은 세계 7대 불가사의중에 하나이고, 계곡의 길이가 장장 227마일입니다.
거의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입니다.
미국의 국립공원가운데 사람들이 제일 많이 찾아 가는 곳입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손님이 오면 제일 먼저 모시고 가는 코스 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스카이워크’라는 설치물을 만들었습니다.
그전에는 계곡위에서 보아야 했지만 이제는 그 계곡 공중위로 유리로 만든 난간이 만들어 졌습니다.
공중에 떠서 그랜드캐년의 볼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닥에서부터 1200미터 높이이고 21미터 공중으로 뻗어 나가게 됩니다.
공중으로 걸어서 그랜드캐년의 밑을 볼수 있는 것입니다.

그랜드캐년에 몇 번을 다녀왔지만 갈때마다 느끼는 것은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LA에서 운전하고 가면 8시간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도착해서는 차에서 내려서 그 엄청난 광경을 보면 ‘와..’ 탄성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는 왔다는 기념으로 증명사진을 찍습니다.
기껏 오래 있어야 30분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나와야 합니다.
‘와’ 한번 탄성을 내기 위해서 하루 종일 차를 타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허무하고 아쉬운 생각이 늘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쉬웠든지 그랜드 캐년의 계곡을 좀더 깊이 볼수 있게 ‘스카이 워크’를 만든 것입니다.
사람들은 25불을 내고 25미터 앞으로 더 나가서 내려다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성에 안차게 되면 조랑말을 타고 계곡에 내려갑니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헬리콥터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서, 그리고 콜로라도강을 배를 타고 즐기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스카이 워크를 만들고, 헬리콥터를 타고 굳이 그 밑에 까지 내려가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그랜드 캐년을 좀 더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냥 위에서 보고 와 한번 탄성을 지르기 보다는 좀 더 가까이 가서 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인 것입니다.

1972년 라이프 잡지에 ‘존 고다드’라는 47세의 남자를 주제로 한 기사가 실려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한 남자의 후회없는삶? 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는데 그 기사로 인해서 라이프잡지는 사상 최고의 판매부수를 기록 할 수 있었다.
존 고다드는 1940년 자신이 15살될 때에 자신이 평생에 꼭 하고 싶은 것 즉 인생의 꿈들을 수첩에 127가지를 적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47세 때 103개를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죤 고다드씨의 꿈은 세계의 아름다운 곳을 다 보고 싶어하는 것이었고, 30년 만에 그의 꿈의 대부분을 이루었습니다.
요즘은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그때만해도 그것은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보고 싶어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공통된 욕망일 것입니다. 형편이 안되서 그렇지 형편만 되면 세계를 일주하고 구석구석을 다 보고 싶은 것입니다.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라도 가서 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세상의 곳곳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싶어 하는 것 보다 사실 더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렇게 다양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이 세상보다 더 위대한 것은 이 세상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분은 세상만물보다 억만배 더 위대한 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이렇게 엄청난 우주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셨을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궁굼증을 더 가지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에 눈을 뜨는 동기가 여러 가지 이지만,
저는 처음 교회에 나와서 ‘창조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나오기 전에는 ‘창조’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습니다.
학교에서 진화론을 배운대로 세상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고, 이 세상의 모든 생명들체은 저절로 진화된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라고 배웠습니다.
그것이 과학이라고 생각하고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와서 창조에 대한 말을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종교적인 이야기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닌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창조론과 진화론을 비교해서 생각해 보아도 진화론이 틀린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으로 사서 본 책이 ‘창조와 과학’이라는 책이었습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진화는 억지로 만들어낸 상상일 뿐이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이렇게 많은 생명체들이 저절로 만들어 지고, 생명체들이 살수 있게 완벽하게 환경이 만들어 지고,
해와 달과 별이 수천년동안 먼지만큼의 오차도 없이 움직여 지는 것이 저절로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창조주 하나님이 계셔서 그 분이 만드셨다고 믿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어마어마한 우주와 세상은 누가 만들었는가?
그 창조주는 얼마나 위대한 분일까?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나니 그 다음부터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 였습니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성경의 이 한마디를 믿으면 그 다음에는 마지막 까지 그냥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우주와 세계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집니다.
우주에 허블 망원경을 띄워 놓고 우주의 더 먼곳을 더 깊은 곳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 우주를 만드신 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창세기 1:1 절을 믿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가 있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냥 우연히 생겨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창조주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우연히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는 다고 하면 이야기는 다른 것입니다.
이 오묘한 세상을 보는 것 만해도 감탄이 저절로 나는데, 이것을 만드신 분은 얼마나 위대 하실까?
그 분을 보고 싶어 할 것입니다.

헤리포터라는 영화를 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주인공을 직접만나 볼수가 있다면 그것은 더 좋은 것입니다.
헤리포터를 건성으로 보는 사람은 영화를 보는 것을 만족하겠지만 헤리포터를 진짜 좋아하는 펜은 그 작가나 주인공의 집에 진을 치고서라도 직접 만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잘라서 팬클럽을 만들 것입니다.
손 한번 잡아 보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나를 이 세상 모든 것 보다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믿는다면 이야기는 더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보고 싶은 것입니다. 보고 또 보고,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은 것입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것입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세상적인 표현으로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팬 클럽이 아니겠습니까?
예사모=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주사모=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주님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모임, 그것이 교회공동체인 것입니다.

요즘은 예수를 믿던 안 믿던 일단 교회에 다니면서, 때가 되면 은혜를 받게 하지만, 원래 교회의 모습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믿은 사람들의 공동체,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예수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직분을 받기도 하고, 예수에 대해서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그들을 배려해야 하고, 기다려야 하고, 그러다가 교회는 수많은 문제 속에 빠지게 되고, 진작해야하는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는 관심도 없게 되는 일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주님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주님을 알지 못하든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될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만나기를 소원하고, 주님을 보기를 소원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성도들은 만날때마다 인사가 ‘마라나타’ 였습니다‘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주님 보고 싶습니다.’
얼마나 주님을 사모했으면, 인사가 ‘마라나타’ 였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조금 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팬’이 아닙니까?
우리는 ‘팬’정도가 아니라,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원토록 동거동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분이 내안에 있고, 내가 그분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면 우리 주님 옆에서 영원히 그분과 함께 있을수 있습니다.
영원히 주님의 보습을 보면서 살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 갈 때는 주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해야 주님을 볼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는것 그것이 복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에게서 모든 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 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아, 그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을 볼수 있는 것은 마음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 하는데 달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청결해야 할 대상을 많은 몸의 지체 중에서 유독 “마음” 에다 두셨습니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부분인 ‘영혼’을 청결하게 하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혹은 네 ‘몸’을 청결히 하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을 청결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특별히 “마음”을 청결케 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심은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마음은 신앙의 중심 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근본은 교리체제나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마음 상태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6:5)고 말씀했습니다.
이는 곧 우리 신앙의 모든 것이 “마음”에서부터 시작됨을 증거해 주는 가장 분명한 말씀인 것입니다.

’마음‘은 모든 행동 동기와 인격의 중심이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행위의 동기를 유발하는 인격의 중심부인 것입니다. ’마음‘에 무엇을 생각하고 게획 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행동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행복‘을 주실 때, 바로 주시지 않고 천사에게 맡기면서 ‘너희가 갖다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천사들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너무 행복해지는 것이 시샘이 나서, 그 행복을 숨겨두기로 했습니다.
한 천사가 ‘바다 깊은 곳에 숨겨둘까?’ 했더니, 다른 천사가 말하기를 ‘그건 안되지. 사람들은 재주가 많아서 바다 속 깊은 곳까지 내려가 찾아내고 말 거야.’
‘그럼 아주 높은 산꼭대기에 감춰 놓을까?’ ‘그것도 안돼. 사람들은 모험심이 많아서 거기까지 올라가 행복을 찾아 낼 거야.’
한참 고심하던 한 천사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했습니다.
“사람이란 제 머리만 믿고, 제 재주만 믿어 자만하기 쉽지. 그러니 자신들과 가장 가까운 마음에다 행복을 숨겨 두면 못 찾을 거야.”
그랬더니 사람들은 정말 어리석게도 자기 마음 속에 있는 행복을 찾지 못한 체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Being Happy’ 라고 하는 책을 써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분이 있습니다.
‘앤드류 매튜’라고 하는 분입니다. 일약 세계적인 작가가 되고 4개 대륙에서 500여 TV,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게 됩니다.
그 후에 ‘Follow Your Heart’ 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앤드류 매튜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다.’라고 합니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꾸는 것은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청결”이란 말의 의미
원래 청결이란 말은 <카다로스>인데 이는다음과 같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깨끗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카다로스>라는 헬라말은 더러운 옷을 세탁하였을 때 사용되는 말로 ‘깨끗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러웠지만 씻어서 깨끗해진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세상의 죄악으로 마음이 더러웠지만 주님의 보혈로 씻음을 받고 깨끗해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청결하다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숙한 마음이 아닙니다.
청결하다는 것은 순해빠져서 아무것도 거절하지 못하는 약한 마음도 아닙니다.
청결하다는 것은 거짓없고, 순수하고, 정직하다는 그런 것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꾸어 지는 것입니다.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5)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이어서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은 겸손의 마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을수 있는 그런 자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낮아 지셔서 제일 천한 자리에 까지 낮아 지셨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잘라 죄인들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 를 지셨습니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섬김과 희생의 마음이 청결한 마음인 것입니다.

둘째,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주석가 Barclay는 타작 마당에서 곡식을 키질 하고 채로 쳐서 모든 죽정이를 제거한 곡식을 말할 때나, 전쟁에 나가려고 군사를 모집할 때 무능력한 군사들을 다 빼버리고 정예된 용사를 일컬을 때, <카다로스>를 쓴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의미 있는 말로 성도가 <일편단심>하나님만을 사랑하고 따르는 신앙 자세를 말합니다.
어려움이 왔다고 흔들리거나, 시험이 왔을 때 흔들리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경고하기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 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야고보서 1:6-8)고 하였습니다.

믿는 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 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는 다는 말입니다.
사람 때문에 흔들리고, 환경 때문에 흔들리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봉사하는 것도, 희생하는 것도 주님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세우실 때,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여호수아 1:7)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하셨겠는가? 주를 따르는 마음이 약해져서 세상과 타협하고, 어려움이 왔을 때 낙심하고 시험에 드는 어리석은 자가 될까? 염려 하셨기 때문인 것이다.

셋째, 청결한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워진 마음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할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무엇으로 채우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름다운 것으로 채울수도 있고, 추하고 어두운 것을 채울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무엇으로 채우는가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몫입니다.

새로운 집에 이사를 하면 주인의 취향에 따라서 가구를 가져다 놓습니다.
주인의 취향에 따라서 장식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마루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카펫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의 취향에 따라서 방을 장식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롬 8:5-6)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인간의 마음이 언제가 가장 아릅답겠습니까?
사랑으로 가득차 있을 때입니다.

최고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왜 최고 입니까?
왜 생명의 종교이겠습니까?
최고의 사랑, 영적인 사랑, 영원한 사랑을 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사랑입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에너지와 생명을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악하게 만듭니다.
세상은 우리를 힘들게 만듭니다.
갈수록 메말라가는 우리의 마음을 살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최고의 관심사가 물질입니다.
경제가 회복이 되면 모든 것이 좋아 질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 사회의 문제가 물질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의 가슴을 살리고 생명을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의 가정을 살리고, 우리의 교회를 살리고
이 세상을 살리는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잘 경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아가페의 사랑, 참 사랑, 위로부터 주시는 거룩한 사랑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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