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8) 의를 위해 고난 받는 사람의 행복

(팔복7) 화평케 하는 사람의 행복
January 4, 2024
더 깊은 영성을 찾아서(1)
January 5, 2024
(팔복7) 화평케 하는 사람의 행복
January 4, 2024
더 깊은 영성을 찾아서(1)
January 5, 2024

(팔복8) 의를 위해 고난 받는 사람의 행복

의를 위해 고난 받는 사람의 행복 마5:3-10

①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②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③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④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⑤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⑥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⑦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⑧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제가 1980년에 미국에 유학을 왔을때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시계였습니다. 새벽에 깨워줄 알람시계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알람 시계를 김스전기에서 샀습니다.

그때 김스전기는 올림픽가 있는 작은 샤핑몰의 구석방을 얻어서 운영 하고 있을 때 입니다.

일제 National 제품인데 19불인가 주었습니다.

이 시계는 저의 미국생활의 역사와 같습니다.

언제나 머리맡에서 저의 잠을 지켜주고 새벽을 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늘 새벽에도 이 시계가 울리는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났습니다.

지난 27년동안 저의 하루는 이 시계에서 울리는 알람소리와 함께 하루를 시작해 왔습니다. 알람이 울리면 스프링 튀듯이 일어납니다. 저는 알람이 울리는데도 침대에 누어서 밍그적 거리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전부터 새벽에 일어날 것을 생각하면서 자기 때문입니다.

잠들기 전에 속으로 ‘나는 내일 새벽에 일어난다..’, 자기 암시를 계속하면서 새벽에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알람이 울리면 곧장 일어나서 샤워장으로 갑니다.

오랜 세월 그렇게 일어나다 보니 알람소리만 나면 무조건 일어나서 샤워부터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자는데 알람이 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벌떡 일어나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고 교회를 갈 준비를 하고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시계를 보니 새벽 1시인 것입니다.

 

제가 오늘 가지고 온 시계가 그 알람시계입니다.

제가 왜 이 시계를 들고 나왔는가? 하면 ‘Faithful’ 이라고 하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시계는 지난 27년 동안 1분도 틀리지 않고 자기의 역할을 감당해 왔습니다.

그것을 영어로 ‘Faithful’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Yellow Stone에가 가면 Old faithful 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땅속에서 온천수가 65-92분 간격으로 솟아 오릅니다.

높이가 106–184 feet (30–55 m) 까지 솟아 오릅니다. 몇분 동안 그렇게 솟아 오르다 그쳤다가 그리고 한시간정도 잠잠 하다 다시 솟아 오르는 것입니다.

변함없이 솟아 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Old faithful 이라고 붙인 것입니다.

‘faith’ 라는 말은 ‘믿음’이라는 말도 되지만, ‘신실. 신의, 신용,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믿을만 하다, 변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이라는 말과, ‘신앙’이라는 말은 같은 단어를 씁니다.

그리고 ‘신실, 정직, 신용’ 모두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라는 말’은 ‘신실한 사람, 변함이 없는 사람, 믿을 만 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이야기 할때 ‘사랑’을 말하지만, ‘신실함’이 반드시 들어갑니다. 신실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없이 믿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실’은 하나님의 성품이고, 그리고 우리 성도들의 성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오늘날 우리 믿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되지 못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지난주에 신문에 보니까 1.5세 2세들을 대상으로 가정의 달을 맞아서 조사를 했습니다.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부모를 존경한다는 아이들이 69%로 가장 많았습니다.

그 다음이 예수님이라 대답한 아이들이 12%, 성공적인 경제인이 11%, 친척형제가 3%, 그리고 목사가 2% 였습니다.

이 통계를 보면서 감사한 것은 부모를 존경한다는 아이들이 69%나 되었습니다. 영어도 잘못하고, 자녀들과 대화도 잘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자녀들이 부모를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것은 목사를 존경한다는 사람이 제일 적은 것입니다. 사업가보다도, 친척, 형제보다 존경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교회들이 늘 싸우고, 갈라지고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자녀들이 목사들에게 실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들은 더 나으냐?

그런것은 아닙니다.

이 통계에서 보여 주는 것은 교회의 직분자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존경을 받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실망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말하는 사람들이 믿음직 하지 못한 것입니다.

 

  •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8복의 말씀은 짧은 말씀입니다.

3절-심령이 가난한자 4절-애통하는자, 5절- 온유한자, 6절-의에 주리고 목마른자 7절-긍휼히 여기는자, 8절-마음이 청결한자, 9절-화평케 하는자

10절-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자..

 

앞부분은 어떤 사람이 복된 사람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뒷부분은 그런 사람이 어떤 복을 받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뒷부분이 더 매력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앞부분을 강조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는가?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실망을 주고 있는 것은 앞부분보다 뒷부분에 집착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 인간의 삶은 being 이라는 것과, doing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being이라는 것은 나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고

doing 이라는 것은 나는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통해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 받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다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being의 문제로 예수님을 찾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doing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성경은 being의 문제가 먼저이고 더 중요하다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팔복의 말씀들은 being 의 문제로 하나님앞에 고민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자, 애통하는자, 온유한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 긍휼히 여기는자, 마음이 청결한자, 화평케 하는자,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자… 모두 어떤 사람들입니까?

 

먹고 사는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앞에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인간사회의 모든 갈등과 분쟁, 그리고 교회의 분쟁은 being의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doing의 문제 때문에 갈등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는 것은

모두가 doing의 문제인 것입니다.

doing의 문제가 필요없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있어야 하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being의 문제로 고민하는 자세가 있어야 올바른 doing이 나올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도, 기도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와 기도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우선적으로, 그리고 더 중요하게 생각되어져야 하는 것이 being의 문제인 것입니다.

나는 어떤 인간이 될것인가? 나는 하나님앞에 어떻게 평가를 받을까 이것을 더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being(존재)’라고 하는 것은 추상명사 처럼 실체가 없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doing 보다 더 적극적인 삶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팔복의 마지막 말씀이 증거하는 것입니다.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것은 가장 적극적인 삶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장 용기 있고, 가장 힘이 있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핍박을 받는 다는 말은 고난받는 것입니다.

고난이되 어쩔수 없이 만나게 되는 고난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나는 고난입니다.

고난을 당할 필요가 없음에도 자원해서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고난은 재해가 아니라 사람에 의해서 고난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고 감옥에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핍박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를 위한 핍박은 그런 고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억지로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적극적으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을 위해서 기쁨으로 고통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고통임에도 불구하고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고 기쁨으로 느껴 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여인이 자녀를 갖는 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여인에게 생명과 같은 몸이 망가지게 됩니다.

아가씨에서 아줌마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도 자녀를 가지고 나서 후회하는 어머니는 한 사람도 보지를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몸이 망가지는 것 보다 자녀가 주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한국의 명성교회 김삼환목사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결혼초기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김목사님은 결혼하고 3개월 만에 군에 입대를 했다고 합니다. 사모님은 잘살던 집안에서 시골골짜기로 자신이 원해서 시집을 온 것입니다.

결혼하고 3개월만에 남편이 군대에 가버리니까 새색시가 혼자 방을 쓸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부모와 6명의 시동생과 한방을 쓰는 것입니다. 낮에는 밭에 나가서 일을 하니까 괜찮은데 밤이 문제인 것입니다. 한방에 시부모 시동생 8명이 잠을 자는데 새색시가 먼저 누워서 잘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늦게 까지 밖에서 일을 하다가 모두가 잠이 들고 나면 그때야 방에 들어 간다고 합니다

8명이 잠을 자고 있는데 발 뻣고 누울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아서 잠을 잤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3년을 지낸 것입니다.

 

부모들이 반대하는데 자신이 원해서 한 결혼이니까 고생해도 말도 못하고 그렇게 견디는 것입니다.

나중에 김목사님이 훌륭한 목회자가 되기를 바라는 그 한가지 소망을 가지고 그 어려움을 견디어 낸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문화는 편리하고 편한 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의 삶을 편하게 만들어 줄까?

어떻게 하면 몸을 적게 움직일까?

그래서 생겨난 것이 리모트 컨트롤입니다. 자동차도 스틱에서 오토매틱으로 바뀌었습니다. 창문도 수동에서 자동으로 바뀌었습니다. 의자를 움직이는 것도 스위치로 바뀌었습니다.

전기밥솟, 세탁기, 진공청소기, 김치냉장고…컴퓨터

어떻게 하면 더 편리하게 만들어 줄까 세상의 과학은 그것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과거에 비해서 너무나 편리하고 편해 졌지만 그것이 우리를 정말 편하게 해 주었는가?

과연 우리가 과거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절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편리하고 편한쪽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 가지입니다. 교회생활도 편리하고 편한쪽으로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녀교육도 교회에서 대신 잘 해주기를 원해서 교육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는 교회를 택합니다.

그것이 과연 축복이 될까?

하나님이 기뻐 하실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편리하고 편한것은 우리를 점점 연약하게 만듭니다.

나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편리한 신앙생활은 자신의 영혼을 갉아 먹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들 것이고, 결국에 가서는 더 큰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수도사들은 일부러 자신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편안한 가운데서는 깊은 영성을 체험하기가 어렵기 때문인 것입니다.

 

경남거창고등학교는 1953년에 설립이 되었고 전영창교장선생님이 3대째 취임하면서 많은 발전을 이룬 학교입니다.

거창고등학교는 기독교교육으로 유명합니다.

 

교육목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 의해 고귀한 인격체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2.인간의 존재 가치는 절대적인 것으로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다.

3.이 세상에는 ‘나’만큼 귀한 ‘너’가 살고 있다.

4.너’라는 존재는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며, 더불어 살아가야 할 나의 소중한 이웃이다.

 

그리고 직업선택 십계명 이라고 적혀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은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신선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이 학교에서 말하는 직업선택10계명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말들만을 하고 있습니다.

 

얼토당토 않는 말인것 같지만, 몇십년전만 해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그런 정신으로 신앙생활을 해온 것입니다.

이 학교의 가르침이 반드시 옳다고만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편하고 편리한 그런 길을 택하지 않고 고난의 길을 택할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최고의 영웅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그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고생을 했지만 그 고생으로 말미암아 아들 솔로몬은 말할수 없는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솔로몬은 고생을 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해보지도 않습니다. 아버지 다윗이 준비해준 풍요를 누리면서 흥청망청 살았습니다. 인간이 누릴수 있는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잘했지만 편하고 배부르게 살다보니 우상을 섬기고 산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하나님이 몇 번이나 경고를 했지만 배부른 그의 신앙은 편한길로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나라는 두쪽이 나고 멸망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인생을 살것인가? 솔로몬의 인생을 살것인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솔로몬의 축복을 누리고 싶어 할것입니다.

다윗처럼 평생 전쟁을 하며 고난속에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것은 우리가 편리하고 편한 삶을 추구하면 우리의 다음 세대가 어떻게 될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입니다. 해아래 새것이 없습니다.

심은데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지 못해서 안타까워 하는 부모님들을 자주 볼수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에 자식을 풍족한 환경가운데 모자람이 없이 키우고 싶은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어려운 환경속에서 자녀들이 자란다고 해서 자녀들이 잘못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어려운 환경속에 자란 자녀들이 부모를 더 생각하고 효도하는 일들이 더 많습니다.

절대 그런 것에 미안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진짜 미안하게 생각해야 할것이 있다면 ,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지 못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미안하게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녀가 불행한 자녀냐 하면, 기도하지 않고, 신앙생활 잘하지 않는 부모를 가진 자녀가 불행한 자녀인 것입니다.

 

(시 128:1-3)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부모님들이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것 처럼 자녀들에게 축복이 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인생이 가장 훌륭한 부모입니까? 어떤 부모가 자녀에게 가장 큰 축복을 가져다 주는 부모이겠습니까?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부모입니다. 의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정의하는 ’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의‘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 고난의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는 자체가 고난의 길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고난입니다.

새벽에 나와 기도하고, 밤에 나와 기도하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생명 걸고 기도했습니다

전도하는것 더 힘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옥에 같히고 수많은 성도들이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신앙은 무엇입니까? 장애물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앞을 향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자면 태풍보다 더 무서운 핍박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내부의 유혹과도 싸워야 합니다.

인간의 육신은 편한 길을 찾습니다. 안전한 길을 찾습니다.

그런 유혹과도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은 영광의 길입니다.

결코 후회하지 않는 길입니다.

 

그래서 오늘 팔복의 마지막의 상급에 대해서는 가장 길게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구절들은 한마디로 끝나지만 11절, 12절에 이어서 설명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마 5:11-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훈장은 국가를 위해서 피를 흘린 사람들을 위해서 준비된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어려움을 당하는것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다가 핍박을 받아 보기도하고, 오해를 받아 보기도 하고, 실망을 하기도 하는 것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시험에 들고, 낙심하고 그러면 안되는 것입니다.

나쁜것만 들추어 내고, 부정적인 것만 이야기하고 그러면 안되는 것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넓은길, 편한길, 편리한 길을 따라 갑니다. 그러나 그 길은 축복이 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easy come, easy go’ 란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까? 믿음의 사람, 신실한 사람

고난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