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본받아(1) 생명
January 5, 2024
그리스도를 본받아(3) 희생
January 5, 2024
그리스도를 본받아(1) 생명
January 5, 2024
그리스도를 본받아(3) 희생
January 5, 2024

그리스도를 본받아(2) 영성

그리스도를 본받아(2) 영성 고전2:12-16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롬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8:7-8)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가끔은 천국과 지옥이 진짜 있기는 있는 것일까? 그리고 하나님은 진짜 계시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생각이 들때가 있지만 하늘을 보고 땅을 보면 하나님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자연만물을 보면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우연히 저절로 생겼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것보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사실 더 믿음이 좋은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저절로 만들어 졌다고 믿으니 얼마나 믿음이 좋은 것입니까?

돌로 만든 불상앞에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썩어진 고목나무에 절을 하며 복받게 해 달라고 빌고 있으니 얼마나 믿음이 좋은 것입니까?

큰 배를 만들어 바다에 띄우기 전에 죽은 돼지고기를 올려 놓고 사고나지 않게 해 달라고 믿으니 얼마나 믿음이 좋은 사람들입니까?

 

‘자동차’가 저절로 만들어 졌고, 살고 있는 집이 저절로 만들어 졌다고 믿으니.. 얼마나 믿음이 좋습니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려고 하지 않으니 ‘마음’이 악한 것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 LA는 태평양 바닷가에 있으니 가끔 바다를 보게 됩니다.

저는 바다의 엄청난 양의 물을 보면 놀라지 않을수 없습니다. 인간은 물 한방울도 만들기 어려운데 저렇게 엄청난 양의 물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하나님의 능력이 놀랍지 않을수 없습니다.

지구의 자전하는 속도가 고속열차보다 5배나 빠른데 바닷물이 한방울도 우주밖으로 튀어져 나가지 않고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것도 신기한 일입니다.

지구의 중력이 조금만 더 커져도 우리는 땅에서 발을 뗄수가 없을 것이고, 조금만 약해도 우리는 공중에 떠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바다의 크기가 지금의 반밖에 안된다고 하면 이 세상의 모든 육지는 사막같이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바다의 크기가 지금 보다 더 커진다고 하면 더 많은 구름이 하늘을 가리게 될것이고 태양을 보기가 힘들어 지게 될것입니다. 그리고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계속 홍수가 나게 될것입니다. 지금 바다의 크기가 지구의 2/3를 차지하고 있는데 지금과 달라지게 되면 지구의 환경이 달라지게 되고 사람이 살기가 어렵든지 아주 불편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바다와 육지의 크기를 조절해서 사람들이 잘 살아갈수 있는 최상의 환경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 그리고 인간이 숨쉬기 위해서 공기가 있어야 하는데 공기는 대략 78%의 질소, 21%의 산소, 0.93%의 아르곤, 그리고 이산화탄소, 수증기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질소가 더 많아져도 안되고, 산소가 더 많아져도 안됩니다. 번개가 치면서 공기중에 질소를 만들어 내고, 지구상의 식물들이 산소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어떻게 수만년이 지나면서도 그 공기의 비율이 똑 같이 유지될수 있을까? 참 신기한 일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저절로 그렇게 되겠습니까?

이것이 어떻게 우연이겠습니까?

 

  • 시편139편을 보면 ‘신묘막측’ 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처럼 영적인 눈을 뜨면 온 세상에 하나님의 손길을 어디서나 느낄수 있습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생생하게 느낄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눈이 뜨지 못한 사람은 보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짐승처럼 아무 생각없이 육적인것만 탐하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사람을 두 종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이 있고 ‘육에 속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고 ‘육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의 일을,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직분을 받고, 목사가 되고 장로, 권사가 되어도 말씀과 기도생활을 하지 못하면 인간적인 생각에 붙잡히게 됩니다. 그것은 어쩔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기도생활 과거에 많이 한 것 소용없습니다.

신앙생활 오래한 것 소용없습니다.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은 매일 달라 지는 것입니다.

어제 ‘성령충만’했다가 오늘은 ‘세상충만’ 해 질수 있습니다. 한때 능력있고 존경받던 목사님들이 넘어지는 이유는 높아지고 존경받고 바빠지니까 말씀과 기도생활을 게을리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생활에 제일 큰 적이 무엇인가? 하면 ‘바쁨’입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수준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은 자신의 수준만큼 생각하고 행동을 하게 됩니다.

유치원생은 유치원생 수준의 생각을 하게 됩니다. 초등학생때는 초등학생수준이고, 청소년때는 청소년 수준이고, 대학색의 수준, 30대의 수준이 있고, 40대의 수준이 있고, 50대의 수준이 있고, 60대의 수준이 있습니다.

나이에 따라서 세상 경험에 따라서 생각하는 수준과 행동이 달라 집니다.

나이보다 성숙한 사람이 있고, 나이값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나이 수준의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도 나이의 영향을 많이 받기는 하지만 영적인 수준은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들이 어릴적에 잘못한 일들이나, 현재 잘못한 일들 때문에 큰 곤욕을 치루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른 친구를 괴롭힌 일들이나 동료들을 힘들게 한 일들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도 인격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하면 용납되지 않습니다.

특히 사람들의 인기를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 치명적입니다. 지위가 높아 갈수록 더 높은 도덕적인 기준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크리스챤은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미국도 세계인들의 리더입니다. 그래서 더 높은 수준의 도덕과 인격의 기준이 요구가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챤은 세상 사람들 보다 더 높은 도덕적인 기준과 인격이 요구 된다면, 교회의 리더들에게는 최상의 도덕적인 기준과 인격이 요구됩니다. 목회자들이나 장로님 권사님 안수집사님, 교사, 부장..등등 교회의 리더들은 세상에서 최고로 높은 수준의 인격과 성품.. 그리고 정직과 순결 등 도덕적인 기준이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인격적, 도덕적인 수준과 함께 영적인 수준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격이 고상해도 하나님과 관계가 깊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수준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수준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단순히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느냐? ‘봉사’를 얼마나 많이 하느냐? 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신앙의 본질’인 것을 깨닫지 못하면 인간적인 열심으로 종교생활을 하는 것 밖에 되지 못합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하는 사실을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수준을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다시 설명을 해 드리려고 하는

‘테레사 아빌라’의 ‘세븐 맨션’입니다.

 

‘아빌라’는 스페인 중부지역에 있는 도시의 이름이고 ‘테레사’는 중세시대에 수도원운동을 했던 ‘수녀’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가장 탁월한 ‘영성가’로 알려진 분입니다.

 

목회자들은 매주 설교를 해야 하기 때문에 평생 책을 가까이 해야 하고, 그리고 수많은 ‘세미나’를 참석하면서 배웁니다.

매주 설교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일주일 내내 생각을 하고 영감을 받기 위해서 기도하며서 하루 하루를 보냅니다.

‘설교’하나를 준비한다는 것은 ‘책’을 한권 쓰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평생 연구하고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목회자의 삶입니다.

 

저도 신학공부를 시작하면서 많은 책을 읽고, 그리고 좋다는 ‘세미나’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목회를 하면서는 기도원을 하시는 목사님들 만큼 기도에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성령운동, 토론토블레싱, 빈야드운동, 온갖 부흥회, 기도원, CCC성경공부, 네비게이터성경공부, 제자훈련, 전도훈련, 두날개훈련, 뜨레스디아스, YWAM의 DTS.. 좋다고 하는 세미나들을 다 참석해 보고 그리고 목회에 적용을 해 보았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아빌라 테레사’의 ‘세븐맨션’ 의 내용이 얼마나 탁월한가 하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부족하지만 저의 경험으로 말씀드릴수 있는 것은 ‘테레사 아빌라’의 ‘세븐 맨션’은 어떤 신앙서적, 세미나 보다 월등히 탁월한 영적인 통찰력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시대의 영성가들이라고 하는 ‘리차드 포스터’나 ‘헨리 나우헨’ 도 ‘테레사 아빌라’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븐맨션’에서 말하는 6단계, 7단계는 일반 신앙인들은 접근하기가 어렵고 목회자들이나 기도하는 분들 조차도 접근하기 어려운 영적인 단계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단계입니다.

6단계, 7단계와 같은 이런 영적인 단계도 있구나 하는 것을 알 필요는 있습니다.

성경에 그런 체험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신앙생활 하거나 목회하시는 분들이 다다를수 있는 단계는 5단계 정도 일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영적인 깊은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고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거듭난 사람은 영적성장을 시작하게 됩니다.

반드시 성장하고 자라나야 합니다.

육신의 나이가 있는 것처럼 영적인 나이가 있고 수준이 있는 것입니다.

 

‘맨션’은 ‘집’을 말합니다. 옛날의 ‘성’을 말합니다.

영적인 단계를 왜 ‘성’으로 표현을 했느냐 하면 그 단계에 있으면 그 안에서 생활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성’에서 사는 사람은 이제 예수를 믿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갓 태어난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지 않지만 모든 삶이 세상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죄를 알기 시작합니다. 그전에는 죄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알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몰랐던 것이 죄라는 것을 알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선행도 하고 싶어 합니다.

▶기도는 하지만 걸음마 단계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오직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기도를 오래 하지 못합니다.

한편으로는 은혜받는 것이 두렵게 느껴 집니다.

성경을 조금씩 읽기 시작하고 자신에 대해서 조금씩 알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초보적인 단계이고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인 관계입니다.

어린아이처럼 홀로 서기 어렵고 주위의 영적 도움이 있어야 신앙생활을 할수 있습니다.

 

두 번째 맨션에 사는 사람은 청소년처럼 영적사춘기에 있는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의 단계는 벗어 났으나 세상과 신앙사이에 갈등을 하게 됩니다.

구체적인 선행도 하고 봉사도 하기 시작합니다.

설교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지만 아직 세상의 습관은 여전히 가지고 있고 여전히 세상과 타협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지만 여전히 세속적인 출세와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지속적을 듣지만 세상과 교회사이에 갈등을 하면서 여전히 세상이 행복과 안전의 중심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리라고 믿지만 여전히 재물을 의지하고 재물이 안전을 지켜 줄 것처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한쪽 발은 세상에 한쪽 발은 교회에 두고 어느 발을 떼어야 하나 갈등을 많이 합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성도들이 두 번째 성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 번째 맨션에 거하는 사람들은 세상과 신앙사이에 균형을 가질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무엇이 우선인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말씀과 기도와 전도의 삶이 우선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규칙적으로 출석을 하고, 봉사를 합니다.

▶적은 죄까지 피하려고 하지만 아직 세속적인 유혹은 남아 있습니다.

▶규칙적인 기도생활과 성경읽기를 하면서 부분적인 내적기쁨과 평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생활에 있어서는 하나님 중심의 기도를 하면서 기도응답의 체험도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영적인 깨달음도 하게 되고 부분적인 치유와 회복의 경험도 하게 됩니다.

큰 죄는 극복을 하지만 적은 죄에 대한 갈등은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 자만심과 교만이 있지만 겸손을 배우려고 노력을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 하면서도 잘 흐트러집니다.

▶일반적으로 ‘예수쟁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고 무슨일이 있어도 ‘신앙생활’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중심적으로 열심히 섬기고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생활 만큼 성품의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경쟁심, 시기심, 분노, 갈등이 남아 있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비판을 듣기도 하고, 자녀들에게 본이 되지 않기도 하게 됩니다.

 

네 번째 맨션에 거하는 사람은 ‘사랑의 실천’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을 배워가게 됩니다.

모든 생활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느낄수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다른 사람 중심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속적인 유혹을 넘어서 하나님과의 사랑을 더 깊이 추구하게 됩니다.

▶일보다 사람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사람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성경말씀에 충실하게 순종을 하면서 균형잡힌 생활과 내적성장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기도가운데 하나님을 느끼고 깊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세상으로부터 부분적인 영향을 받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사람과 환경 때문에 시험에 들거나 상처받지 않습니다.

나와 다른 것을 포용하고 수용하면서 분노를 조절할수 있게 됩니다.

 

▶기도가 생활이 되고 성령의 열매에 대한 갈망이 커집니다.

▶더 깊은 영적인 전쟁을 하게 되면서 한편으로 내적인 곤고함으로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자각을 하게 됩니다.

 

다섯째 맨션은 ‘연합’을 이루는 단계입니다.

이것은 일반 평신도나 목회자들이 이를수 있는 최상의 단계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 ‘성’에 거하는 사람들은 오직 주님만 바라보면서 주님과의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잃어 버린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도 함께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앞에 헌신을 하면서도 부족함을 느낍니다.

주님께 옥합을 깨트린 ‘마리아’처럼 가장 귀한 헌신을 하면서도 더 드리지 못해 안타까워 합니다.

▶말과 감각을 넘어서 하나님과 교제를 합니다.

온전한 영적인 삶과 사랑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웃을 향해서는 희생적인 섬김과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단계에 들면 ‘Doing’에서 ‘Being’으로 바뀌게 됩니다.

‘Doing’과 ‘Being’은 우리 교우들은 제가 자주 말씀을 드려서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생활에 있어서 큰 변화입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를 믿어도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 라는 말들을 합니다.

타고난 성품이 바뀌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어려운 것이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과의 갈등이 있고 상처를 받고 분노가 생기고 하는 것은 ‘Doing’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Doing’은 ‘일’과 ‘행함’입니다.

세상은 능력이나 업적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Being’은 ‘존재’입니다.

사람을 볼 때 능력이나 일이나 행함이나 이런 것으로 평가를 하지 않고 ‘존재’ 자체만을 귀하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주신 것은 우리 인간을 ‘행함’으로 보신 것이 아니라 ‘존재’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 ‘존재’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녀는 ‘존재’ 자체로 사랑을 하지만 다른 사람은 ‘행함’으로 판단하고 평가하고 사랑을 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Doing’에서 ‘Being’으로 변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자녀’를 사랑하듯이 ‘존재’로 사랑할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다섯째 맨션의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예배와 봉사’가 동일하게 됩니다.

모든 삶 전체가 하나님앞에 드리는 예배가 됩니다.

롬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하신 말씀처럼

예배시간만이 예배가 아니라 봉사하는 것도 예배요 숨쉬는 것도 예배요 모든 것이 하나님앞에 드려지는 예배의 삶이 됩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신실한 성도, 주님을 온전히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라면 언젠가는 다다를수 있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이를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해야 이를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단계에 이르면 모든 갈등과 상처에서 초월해 질수 있습니다.

감사와 기쁨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신앙의 완성 같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테레사 아빌라’의 도표를 보면 아직 두 단계가 더 남아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이것은 세상 생활하면서는 다다르기 어려운 단계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신 수도원적인 삶을 사시는 분들에게나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다다르기 어려울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아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여섯째 맨션은 주님과 온전한 영적인 연합을 이루는 단계입니다.

주님과 깊은 연합을 이루면서 온전히 주님께 순종하는 삶입니다.

모든 삶이 말씀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겸손과 순종과 기쁨의 삶입니다.

말과 감각을 넘어서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이루게 됩니다.

▶이 단계의 특징은 ‘기쁨과 고통’이 동일하게 느껴집니다. ‘기쁨’과 ‘고통’이 동일하게 느껴지다니 참 꿈같은 이야기 아닙니까?

▶그리고 또 다른 특징은 ‘Dark Night’라는 깊은 어두운 밤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나? 영적인 깊은 갈등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죄의 본질’에 대한 깊은 자각과 저항입니다.

사도 바울이 외친 것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지랴’ 고백한 것처럼 자신의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죄의 본질속에 고뇌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일곱째 맨션은 ‘신비한 연합’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영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신비한 관계를 말씀합니다.

완전한 안정과 평안, 그리고 완전한 예배와 봉사… 존재와 행함의 완성속에 완전한 자유함을 누리는 마치 이땅에 있으나 천국에 있는 것 같은 상태입니다.

과연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단계도 있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큰 은혜입니다.

아마 우리는 이땅을 떠나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그때는 우리 모두가 일곱째 단계속에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요17장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계속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주기도문에서도 ‘아버지’를 부르고 시작합니다.

‘아버지’를 부른다는 것은 ‘관계’를 말합니다.

신앙생활은 ‘아버지와의 관계’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놓치게 되면 신앙생활의 본질을 잃어 버리고 잘못된 열심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열심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고 상처를 주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면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신앙의 성숙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숙해 지는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고, 봉사도 해야 합니다.

일도 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 ‘일’중심으로 생각하면 ‘사람’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사람’은 수단이 되어 버립니다.

‘능력’위주로 사람을 평가하게 됩니다.

그래서 필요한 사람, 필요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사람을 평가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행함’으로 우리를 평가하셨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을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존재’로 보시기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의 의미인 것입니다.

 

목회자나 장로님 권사님들은 이 수준에 와 있어야 합니다.

‘행함’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존재’로 사람을 보고 사랑할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교회 될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 천하보다 귀한 존재라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아비의 마음’으로 볼수 있어야 합니다.

사역에 대한 열망도 있어야 하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더 커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의 형상에 더 가까이 갈수 있을 것입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