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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높은 곳을 향하여 (9)

더 높은 곳을 향하여 (9) 제자도 마16:23-25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한때 한국은 ‘Me Too운동’ 이라는 것 때문에 난리난 적이 있습니다. 원래 시작은 2006년도에 미국에서 여성보호차원에서 시작이 되었는데 근래에 한국에서 터지면서 유력한 차기 대통령후보인 사람이 무릎을 꿇고, 어떤 분은 자살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Me Too… 라는 것은 그렇게 부정적인 의미로 쓰는 말은 아닌데 이번에 한국의 스캔들 때문에 한국 사람들에게는 ‘미투’라는 것이 부정적인 단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미투-’라는 것은 ‘나도-’ 라는 말 정겨운 말이 아닙니까?

‘여행가고 싶다’ ‘미투’..식당에 가서 뭐먹을래? 김치찌개? ‘미투’ 하면 나도 김치 찌개,,

‘커피 먹고 싶다’ 하면 ‘미투’ 나도 커피먹을래..

‘사랑해’ 하면 ‘미투’ 나도 사랑해..참 좋은 단어 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미투’하면 ‘너도 당했어?’ 라고 오해 하게 생겼습니다.

‘단어’ 라는 것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즘 한국 뉴스나 방송을 들으면 저의 귀에 거슬리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한국 사람들이 말을 할 때 끝에 붙이는 말이

‘뭐 뭐 같애요’ 라는 말입니다.

‘이랬던 것 같애요, 저랬던 것 같애요..’

‘좋았던 것 같애요, 싫은 것 같애요,’ 평창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고 인터뷰를 하는 선수들도 ..열심히 했던 것 같애요, 운이 좋았던 것 , 성공한 것 같아요, 실패한 것 같아요..잘한 것 같아요, 못한 것 같아요…

여러분은 ‘같애요’라는 말이 거슬리지 않습니까?

 

좋으면 좋은 것이지 ‘좋은 것 같애요’ 는 뭐고 ‘싫은 것 같애요’는 뭡니까? 열심히 했으면 열심히 한것이지 안했으면 안한 것이고, 잘했으면 잘한 것이고, 못했으면 못한 것이지

사랑하면 사랑한 것이고, 미워하면 미워한 것이지…

모든 말에 같애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애매 모호하게 말을 하는 것을 들을수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 말이 원래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었었던 같은데 요즘 유독 그렇게 말들을 표현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삶에 자신이 없어서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으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애매하게 표현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지 않은가 싶습니다.

 

특히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렇게 애매모호하게 표현하면 안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해야지 ‘믿는 것 같애요..천국 갈 것 같애요…’

나는 신앙생활 열심히 합니다.. 해야지 열심히 하는 것 같애요.. 요즘 잘 못하고 있는 것 같애요..‘주님 사랑해요’ 라고 해야지 ‘주님 사랑하는 것 같애요’.. 이런 표현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신앙고백은 확실해야 합니다.

조금도 의심하거나 흔들리면 안됩니다.

 

우리가 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예배때 마다 사도행전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우리의 믿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것을 확실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머리에 새기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인 것처럼 나의 신앙고백을 확실하게 반복해서 머리에 새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나 모든 것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이 확실하고 든든한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체력이 영력’이라는 말입니다. 목회자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영적인 힘입니다. ‘말씀과 기도의 힘’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설교를 잘하고, 기도의 능력이 있고, 사역을 잘해도 건강을 잃어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건강을 잃어 버리면 성경도 읽어지지 않고, 기도도 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체력이 영력이다’ 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체력은 운동선수에게도 정치인에게도 사업가에도 똑 같습니다. 건강을 잃어 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에 ‘체력’처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신앙고백’입니다.

 

오늘 말씀은 신앙생활과 제자의 길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마16장, 막8장, 눅9장에도 함께 나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이전에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는 멋지게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네게 알게 하신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다..’. 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출발은 신앙고백입니다.

제자가 되기 이전에 먼저 확실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믿는 것 같애요.. 천국갈 것 같애요’ 그런 신앙고백으로는 안됩니다. 잠자다가 벌떡 일어나도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이시간 죽어도 천국에 갑니다..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확실한 신앙고백이 있습니까? 아니면 남 몰래 고민하고 계십니까? 나는 오래 믿었는데. 집사, 권사, 장로, 목사인데.. 내가 진짜 천국 가는 걸까? 하고 고민하시지는 않습니까?

누가 뭐래도 세상이 아무리 흔들어도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천국갑니다… 확실하게 말할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확실한 신앙고백을 했다고 의심이 전혀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과 사탄은 끊임 없이 우리들의 신앙고백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의심할만한 일들이 매일 같이 일어나는 세상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하지만 두사람의 사랑을 흔들어 놓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것처럼 우리들의 신앙고백을 의심하게 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게 됩니다.

 

매일 말씀과 기도로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수많은 생각과 사건들이 우리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다른 것 아닙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때의 그 감격과 기쁨을 잃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 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처음에 했던 신앙고백이 갈수록 더 확실하게 느껴지고 체험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성장이고 그것이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 시대에 가장 존경을 받았던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신앙이 좋은 부모밑에서 성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잘했습니다.

그리고 평생 복음 전도자로 살았습니다.

우리 한국과는 더 인연이 많습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도 한국을 방문했고, 끝나고 나서 1956년에도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1970년대, 80년대에도 한국을 방문해서 여의도광장에서 집회를 하셨습니다.

 

빌리 그래함은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창세기에서 예수님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다.

출애굽기에서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이시다.

레위기에서 예수님은 속죄 제물이시다.

민수기에서 예수님은 반석이시다.

신명기에서 예수님은 선지자이시다.

여호수아에서 예수님은 여호와 군대의 총사령관이시다.

사사기에서 예수님은 구원자이시다.

룻기에서 예수님은 천국의 친족이시다.

사무엘에서 역대하의 책에서 예수님은 약속의 왕이시다.

느헤미야에서 예수님은 그 민족의 회복자이다.

에스더서에서 예수님은 변호자이시다.

욥기에서 예수님은 구속자이시다.

시편에서 예수님은 나의 전부이시다.

잠언에서 예수님은 나의 귀감이시다.

전도서에서 예수님은 나의 목표이시다.

아가서에서 예수님은 나를 만족시키는 자이다.

예언서에서 예수님은 장차 오실 평강의 왕이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죄인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시는 그리스도이시다.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서신서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이시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도 처음부터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이해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살아 가면서 점점 더 깊이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신앙고백은 우리의 신앙의 기본입니다. 주님앞에 갈 때 까지 매일 같이 순간 순간 확인해야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확실해야 반석위에 집을 지을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악가들은 매일 발성연습을 합니다.

피아니스트들은 매일 건반을 칩니다.

운동선수들이 매일 연습하는 것은 기본훈련입니다. 체력훈련입니다.

 

기본이 만들어 졌으면 그 다음에는 뼈대를 세우고 튼튼한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고 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고 하시자 절대 그럴수 없습니다. 하고 반대 했습니다.

그러자 하신 말씀이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하면…’

제자가 되고자 하면…이라는 말씀이겠지요..

 

우리는 예수믿고 천국가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일을 하기 위해서는

 

첫째,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운다,, 내려 놓는다.. 제일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그리고 내려 놓을수 있는 것은 신앙이 깊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처음 부터 그렇게 할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에 이것이 확실하지 않으면 뿌리를 내리지 못한 나무처럼 신앙이 제대로 성장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발전하지 못한다는 것은 처음 시작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본기가 튼튼하지 못하면 발전하지 못합니다.

음악도 미술도 운동도 똑 같습니다.

사람들은 멋있어 보이는 테크닉을 빨리 배우고 싶어 합니다.

기타를 배우는 사람들은 에드립을 배우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멋있어 보이는 테크닉부터 배운 사람들은 발전을 하지 못합니다. 어느 수준에 가면 더 이상 발전을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큰 결단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걸고 생명을 건 결단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백화점에서 여러가지 좋은 물건들이 많이 있는것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결단입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하는 결단입니다.

지옥에서 고통속에서 영원히 살것이냐? 아니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며 상상할수 없는 기쁨과 행복가운데 살것이냐 하는 결단입니다.

엄청난 사건입니다.

 

우선 믿어 지는 것이 엄청난 일입니다.

믿어진다는 자체가 내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깨우쳐 주셔야 믿어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믿어진다는 것은 이미 성령님께서 역사를 하셨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내 인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어느 한 부분만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부인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어떤 것은 맡기고 어떤 것은 내 생각대로 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처음 믿을 때 신앙고백이 확실하고 그리고 확실하게 결단을 하면 그 다음의 결단은 훨씬 쉽습니다.

그런데 처음 시작에서 확실한 결단을 하지 못하면 나중에 결단하기는 더 어려워 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다 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증거로 ‘성수주일을 하고 십일조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성수주일’은 시간의 주인이 주님이시고, ‘십일조’는 물질의 주인이 주님이시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이 문제에 걸리게 되면 신앙이 그 이상 발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더 진전이 되지 못합니다.

 

이것이 확실하게 되지 않으면 아직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19장에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찾아 왔다가 나를 따르려거든 너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그 말씀에 근심하면서 돌아 섰습니다.

 

성수주일과 십일조 생활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 하는 것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는 시작일 뿐입니다.

 

신앙은 어디 까지 가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모든 것을 주셨듯이, 나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기쁨으로 자원해서 드릴수 있는 단계에 까지 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여정입니다.

그런데 성수주일, 십일조에도 갈등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 이상의 것을 드릴수가 있겠습니까?

 

마4장, 막1장, 눅5장에 베드로와 안드레,,야고보, 요한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찾아 오시자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하게 생각했던 재물을 다 내어 놓았습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옳고 나는 틀리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자신을 부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주님을 믿기 때문에 자신을 부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습니다.’ 라는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모든 관계가 다 그렇습니다. 좋은 관계를 만들어 주는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입니다.

반대로 관계를 깨뜨리는 가장 큰 원인은 의심입니다.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믿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요한1서 4:18)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믿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결과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죽는것 조차도 기쁨으로 받아 들일수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남녀가 만나 사랑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이제 법적인 부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녀도 낳아서 기르고 먹고 살만큼 재산도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두 사람이 행복한가? 하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그리고 아버지와의 관계가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 믿고 행복하게 살수도 있고, 예수 믿으면서도 여전히 갈등하면서 살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만큼 행복해 질수가 있고, 신뢰하지 못하는 만큼 갈등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게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신 이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 믿는데 행복하지 못하다고 해서 구원을 잃어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나쁜일을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지만, 행복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목사님들이 ‘행함’에 대해서는 강조를 많이 하지만 ‘행복’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행복’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십자가’라는 말로 포장을 하려고 합니다.

예수 믿는 것, 목회하는 것.. 힘든 일입니다.

그렇지만 행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 행복하지 못하다고 하면 그것은 어떤 행함보다 더 좋지 않은 행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늘 행복 할수는 없습니다.

늘 갈등하고 고민하면서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예수 안에서 행복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서로 사랑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저는 ‘서로 사랑하면’ 이라는 말을 ‘서로 행복하면’이라고 표현 하고 싶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행복은 있을수 없지 않습니까?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행복할수 없습니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행복입니다.

행함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행복’입니다.

‘행함의 기본’은 ‘행복’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행함의 시작은 ‘섬김’입니다.

그런데 행복한 마음이 없이 섬기면 그것은 온전한 섬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행복한 마음이 없이 찬양을 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찬양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헌금을 드리는 것도 행복한 마음에서 드려야 합니다.

고후9장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가장 기쁜소식입니다.

가장 기쁜 소식을 가진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보다 모순은 없습니다.

 

목사는 제일 행복해야 하고, 앞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행복해야 합니다. 찬양을 인도하시는 분들은 최고로 행복해야 합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복음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자신의 독생자 아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이 이루고 싶은 꿈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싶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과 여러분의 자녀를 바꿀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수 없는 것이 자녀입니다. 차라리 자기 목숨을 내어 놓고 서라도 자녀를 구하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죽이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셨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고통가운데 죽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으면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가 될수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상상도 할수 없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이상으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표현할 때 최고 수준의 표현은 ‘죽고 못산다’ 저 두사람은 죽고 못살아…

그 이상의 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내가 없으면 죽고 못사신다’는 확신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음으로 몰아 내실 만큼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없으면 죽고 못사신다’라는 표현이 과장되거나 우스개 표현이 아닙니다.

실제 하나님은 그보다 더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그 엄청난 사랑을 받으면서도 행복하지 않다고 하면 그것보다 더 큰 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행복하지 않다면 한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딴데 가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 보다 세상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사명입니다. 해야 하는 일입니다. 무거운 짐입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짐입니다.

인생이 왜 힘이 듭니까? 짐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짐은 감당하기 정말 어려운 무거운 짐입니다.

가정이라고 하는짐.. 어떻습니까? 무겁습니다.

엄청 무겁습니다.

교회라는 짐.. 엄청 무겁습니다.

아버지라는 짐.. 엄청 무겁습니다. 목사라는 짐.. 엄청 무겁습니다.

 

짐을 가볍게 느낄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서 ‘서로 사랑하라’ ‘사랑 하라’ 계속 강조하는 이유는 사랑만이 인생의 무거운 짐을 견딜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아낌 없이 내어 주실수 있는 힘은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살수 있는 날이 한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먹고 사는 일에 아웅다웅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버킷 리스트’영화처럼 아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인생을 마치고 싶어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꼭 그렇게 암선고를 받고, 인생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될 때 까지 기다렸다가 그때야 사랑하시겠습니까?

 

버킷리스트의 영화에 나오는 ‘카터와 에드워드’라는 사람은 하고 싶었던 일을 했던 지난 일년의 시간이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다고 고백을 하면서 눈을 감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좀더 일찍 그렇게 살아 간다면 우리의 삶이 훨씬 더 만족스럽게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열정적으로 사셨습니다.

그 열정의 근원은 사랑이었습니다.

온전히 사랑하셨습니다.

(요10:10)내가 온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방법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생명을 얻게 하고 다른 사람이 더 풍성한 삶을 살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고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이 죽으셨습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님처럼 그렇게 할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 흉내를 내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예수님처럼 완전한 희생은 못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남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희생하면 희생할수록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가 돌아갈수가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는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고 행복할수 없습니다.

좋은 열매 맺을수 없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의 80번째 생일 후 래리 킹은 그와의 인터뷰에서 “당신의 삶을 뒤돌아보면 당신은 상을 받아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후회도 없겠지요?”라고 질문했다.

이에 빌리 그래함 목사는 자신이 실패자란 이야기와 함께, “나는 사람들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고 반대로 하나님과는 너무 작은 시간을 보냈지요. 사업상 미팅을 하느라 너무 바빴고 예배에도 너무 바빴어요. 나는 하나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어야 했어요. 그랬으면 사람들이 나와 함께 있을 때 하나님의 임재를 더 느낄 수 있었을텐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명’을 이야기 할 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하나님과 함께한 시간이 적었던 것을 후회하는 것처럼..‘복음’전하는 것 보다 우선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첫 번째 이고 또한 행복일 것입니다.

행복한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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