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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높은 곳을 향하여(5)

더 높은 곳을 향하여(5) 돕는사람 행9:26-31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듣는 말은 ‘사람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어라’ 라는 말입니다.

사람 때문에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또한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고 시험에 드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사람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어라’…. ‘사람은 믿을 존재가 못된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온전한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은 사람들과 멀어져야 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 할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때 만족함이 없었네…’

라는 복음찬양의 가사처럼 세상과 사람은 부정적인 표현의 대상이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에게 집중을 하는 것은 세상과 사람은 건성으로 대충, 어쩔수 없이 상대해야 하는 대상을 잘못 생각할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되면 사람들에게 마음을 내어 줄 공간이 없어지는 것 처럼 생각 할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에게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아낌 없이 주실 만큼 귀한 존재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시는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지극히 말 안듣고, 지극히 속썩이고, 틈만 나면 배반하고 돌아서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을 하나님은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실 만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순서의 차이일 뿐이지 절대 소흘히 할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사람도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인간의 사랑의 한계입니다. 인간이 할수 있는 사랑은 한계가 있습니다.

한 사람을 온전하게 만족 시켜 줄수 있는 사랑을 인간은 할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몇사람이나 만족 시켜 줄수 있는 사랑을 할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사랑은 한 사람도 제대로 만족 시켜 줄수가 없습니다. 부부가 평생 함께 살아도 한 사람에게 평생을 헌신해도 그 한 사람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사랑의 한계입니다.

 

부자지간에도, 부부간에도 사랑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것이 인간인데 친구, 친지, 그리고 교우들을 충족시켜 주는 그런 사랑을 우리는 할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사랑이 나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여러분의 사랑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고 해서 교회가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전한 사랑을 받고 나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 아닙니까?

내가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럴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도 역시 남을 만족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것은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 역시 더 커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사람들이 좋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기피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사람들이 싫어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 얌체 같은 사람 둘째, 불평이 많은 사람

셋째,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 둘째, 베풀고 희생적인 사람

셋째, 돕는 일에 압장서는 사람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사람, 싫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사람은

첫째,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둘째,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사람

셋째, 맡은 일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사람은

첫째, 믿음이 좋은 사람 둘째, 사랑이 많은 사람

셋째, 기도하고 전도하는 사람

 

우리는 하나님도 좋아하고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사람은 그런 사람입니다. ‘바나바’라는 사람입니다.

 

신앙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 이 시대에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은 행동하는 크리스챤입니다.

 

신약시대에 가장 위대한 인물중의 한사람을 사도바울로 말합니다.

그의 사역은 12제자 보다 더 많았습니다. 그는 세계선교의 문을 연 사람이요, 교회역사를 정착시킨 사람입니다. 신약성경의 반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위대한 바울을 이야기 할때 빼 놓을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나바 라는 분입니다.

업적은 바울이 더 많이 남겼지만 인격적으로 볼때 바울보다 더 뛰어난 사람입니다. 남을 세워 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바울을 이어주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오늘의 사도바울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도행전9:26 “사울이 예루살렘에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것 처럼 바울은 초대교회시절에 교회를 가장 어렵게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데 압장섰던 사람입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는 것이 그의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임받은 책임자 였습니다. 과거에 독일의 게쉬타포 처럼 예수믿는 사람들에게는 공포스러운 존재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느날 ‘나도 예수 믿는다.’.하고 앞에 나타 났으니 사람들은 믿을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두려운 눈, 의심의 눈으로 멀리 하고 있을때 바나바가 나서서 그를 지지 합니다. 반면에 바나바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믿을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나바가 내가 보증하겠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바울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받아 들이게 된 것입니다.

 

첫째. 바나바는 위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별병이 ‘위로자’였습니다. 바나바라고 하는 말은 위로자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 만큼 남을 위로하고 남을 도와주고자 애를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원래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초대교회에서 얼마나 사람들을 위로하고 돕는 일을 많이 하는지 사도들이 붙여준 이름이 바나바 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길을 가면서 힘들게 고군분투하면서 살아 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쉽게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인생이 소설을 써도 모자랄 만큼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릴때는 어린대로 고민과 어려움이 있고, 청년이 되면 그때의 고민이 있고, 40대의 어려움이 있고, 50대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하고, 경쟁상대와 싸워야 하고, 매일 매일 긴장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모두가 폭발하기 직전의 상태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풍선을 잔뜩 불어 놓으면 작은 바늘만 갖다 대어도 터져 버립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뚜껑이 열리기 일보 직전의 상태로 살아 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교회에 오는 것은 열리기 일보 직전의 상태를 좀 빼고 싶기 때문입니다. 위로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쉬고 싶기 때문입니다.

주일은 안식일입니다. 쉬는 날입니다. 죄짐도 내려놓고, 인생의 짐도 내려 놓고 마음이 쉬는 날이 주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위로 받고 싶어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늘 긴장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살다가 주일은 위로 받고 싶어서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가끔 기독신문을 보면 목사님들이나 신학자중에서 오늘날 교회가 부패한 것이 목사님들이 너무 위로의 설교만 하고 죄를 정죄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주장하시는 글을 쓴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그런 글을 보면 화가 납니다.

‘너나 잘해’ 귀싸대기를 한대 올리고 싶어 집니다.

 

오늘날 교회가 문제가 많은 것은 참된 위로가 없어서 그런 것이지 죄를 지적하지 않아서 그런것 아닙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미국이나 한국의 교회들의 문제는 목사님들이 부패하고 타락한 것이 주된 원인이지 죄를 지적하는 설교가 부족해서 그런것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기본 양심이라는 것이 있고,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매 주일마다 설교를 듣고, 기본적인 성경은 모두 알기에 무엇이 옳고 잘못된 것인지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죄를 지적하지 않아도 본인 스스로 양심에 따라서 자신의 죄를 알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지적을 받기때문에 자신의 죄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죄를 지적하시기 때문에 죄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의 죄에 간섭하지 않아도 성령님께서 하시고 본인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귀를 막고 성령의 책망을 듣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몰라서 죄를 짓고 있는 것 아닙니다.

 

구약에 보여지는 하나님의 모습과 신약의 예수님의 모습은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무서운 모습들이 종종 보입니다.

레10장, 나답 아비후의 죽음.. 제사를 잘못드렸다가 아론의 두아들이 죽습니다. 오늘 날 우리가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 나답과 아비후 처럼 될 사람들이 많습니다.

 

민16장, 고라 다단 반역에 온 식구가 몰살을 당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무섭게 심판을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이 불행해 지는 모습들을 종종 보게 되지만 구약처럼 그렇게 무섭게 심판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심판자로 오신것이 아니라, 스스로 심판을 받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위로자로, 치료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그렇지만 그 회개하라는 일반적인 말씀입니다.

개개인의 죄를 정죄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달아야 하고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할 자격은 없습니다.

때로는 권면도 필요하겠지만 그 보다 훨씬 더 많이 해야 하는 것은 위로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배신하고 도망가 버린 제자들을 찾아 가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회개하라고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불을 피우시고 음식을 준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회개는 성령님이 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죄를 지적합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그리고 바라새인들, 서기관들은 책망했습니다. 왜 그들을 책망했습니까? 그들의 죄가 더 커서 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힘든 인생을 더 힘들게 만드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위로의 공동체 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안식을 얻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온전한 예배를 드리며 그 결과로 찾아 오는 것은 평안과 안식과 확신입니다.

 

율법으로 온전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나서 구약시대 보다 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랑에 매여서 다시는 배신하지 않고 주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기쁨으로 드릴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진정으로 굴복 시키는 것은 사랑입니다.

협박으로는 온전한 순종을 만들어 낼수가 없습니다.

 

미국에 있는 스미스 소니언 박물관에는 아브라함 링컨이 암살당하던 날에 주머니 속에 있었던 물품이 전시돼 있습니다. ‘링컨’이라고 수놓은 작은 손수건, 연필깎이, 칼, 면실로 짠 안경집, 5달러짜리 지폐가 한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낡은 종이가 접혀져 있었습니다. 그 종이는 신문기사를 찢어서 접은 것이었습니다. “링컨은 모든 시대의 가장 위대한 정치가 중 한 사람이다”로 시작하는, 대통령으로서 그의 업적을 칭찬하는 낡은 신문기사 한 조각이었습니다.

제일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영웅 링컨조차도 마지막 순간까지 누군가의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불평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화를 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책망하셨습니다.

나의 영광을 가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모습을 잘못 전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할때 무서운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것은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부끄럽고 하나님앞에 나가기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인자하시고, 사랑많으시고, 오래 참아 주시는 위로의 하나님 이십니다.

 

(고후 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고후 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사 66:13)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고후 1:4-5)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사 66:13)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보혜사 성령님은 위로하신 분이시고 도우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서로 필요한 것은 위로하고 돕는 일입니다.

 

돕는 일중에서 제일 큰 도움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말없이 함께 해 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임에 함께 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성들여서 음식을 준비했는데 손님들이 오지 않으면 많이 서운 할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행사에 함께 하는 것이 위로하는 것이고 돕는 것입니다.

 

둘째, 바나바는 베푸는 사람이었습니다.

행4:36에는 “구브로에서 난 레위 족인이 있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앞에 두니라”

자기의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교회를 위해서 쓴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돈’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돈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제일 걸림돌이 되는 것이 ‘돈’입니다.

‘돈’을 초월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가질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 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온전하게 믿을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수 없다’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을 보면 그가 얼마나 베푸는 사람인가 하는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그의 조카 롯과 갈라질때도 좋은 땅은 조카 롯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조카 롯이 이방사람들에게 잡혀갔을때 생명을 무릎쓰고 쫓아가서 그를 구해온 사람이었습니다.

 

요셉도 온 가족을 살렸던 사람입니다.

 

모세도 민족을 돕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세상에 보장된 부귀영화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길을 택했습니다.

 

다윗도 베푸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엄청난 재물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데 바쳤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 그리고 일반역사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가 문제를 보고 외면하는 사람이 아니라 베풀고자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이십니다.

(사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성도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도와주려고 하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 늘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도움을 주려고 하는 많은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행복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두려워 하고,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성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도움속에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성도역시 도움을 베풀고자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베풀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가는 사람은 자연히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됩니다.

 

과거에 자기것만 알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던 사람들도 예수를 만나고 성령을 모시게 되면 베풀고자 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지게되는 것입니다.

 

욕심장이 삭게오는 자기것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배만 채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남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 하지 않았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자기 배만 채우려고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일 먼저 한 것이 만일 남의 것을 빼앗아 온 것을 4배로 갚겠다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남의것을 빼앗아 살던 사람이 베푸는 사람으로 바뀌게 된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된 첫 번째 모습입니다.

 

만약에 내가 환영을 받지 못하는 사람에 속한다면 다른 사람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나를 환영하지 않을까?

 

자신의 것을 더 챙기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베풀고자 하는 사람은 당연히 환영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도움을 베푸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도 장사를 하러가는 바쁜 처지 였지만 그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이 진정한 이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웃의 고통을 돌아보아 주는 사람, 도움을 베풀어 주는 사람이 이웃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산사람들을 통계적으로 뽑아서 그들의 삶의 자세를 연구한 보고서가 얼마전에 발표가 되었습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사람의 태도는 “What can I do for you?” 였다라고 통계는 말하고 있습니다.

도움을 주고자 하는 사람들은 지도자가 될수가 있습니다. 도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리더가 되지 못했습니다.

 

크리스챤은 철저하게 베풀고 돕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나올때는 도움을 받고자 나왔습니다. 도움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도와 주십니다.

 

허성현목사님교회에 어느 분은 새가족에게 주는 십자수 십자가를 만들어 10년 동안 준비해 주시는 분이 계신다고 했습니다. 한올 한올 새가족을 기다리면서 기도하면서 만든다고 합니다. 그런 정성이 바나바의 마음입니다.

 

특히 현대사회와 같은 삭막한 환경속에서 인간미 넘치는 공동체는 어느때 보다 더 절실히 필요하고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으로 살수 있는것도 아니요, 기계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만으로 만들어 낼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 보다 잘 할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상실하면 교회는 생명을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2세들이 나이가 들어서 교회를 떠나는 가장큰 이유가 교회에서 받은 상처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른들이 사랑의 공동체의 삶을 보여주지 못하고 교회가 깨어지는 것을 보고, 부모들 교회를 자주 옮기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은 교회에 대해서 흥미를 잃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맛을 내지 못하면 아무 맛을 내지 못합니다.

 

이런 사랑의 공동체는 모두가 같이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민생활에 피곤하고 지쳐서 남에게 관심을 가지고 남을 환영하고 받아줄만한 여유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주시는 사랑을 받고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사람을 받아주고 사랑을 베풀어 줄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위로자가 되려면 우선 내 마음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빡빡하고 힘들면 남을 위로할 여유가 없습니다.

 

더 높은 곳을 향해서 나가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하나님의 더 깊은 위로를 체험할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해야 다른 사람도 위로하고,

다른 사람도 살리고, 다른 사람도 세워줄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와 같은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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