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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높은 곳을 향하여(7)

더 높은 곳을 향하여(7) 깊은기도 엡3:14-19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바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 지리라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바램은 바램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믿음은 바램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이루어 질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바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자녀들이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바라는 것이 있고, 교회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이 이랬으면 좋겠다 하고 바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소원이라고도 하고 꿈이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고 소원해야 하는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가장 중요한 소원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소원입니다. 나는 이런 신앙인이 되고 싶다는 바램입니다. 이것은 사실 가정 중요한 소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다른 사람이나 세상이나 교회에 대한 바램은 많으면서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한 바램은 크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다른 사람들 말을 하고, 세상 정치를 이야기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그것보다 우리 자신에게 더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말씀은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있는 거울입니다.

(고후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딤전 5:22)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금년에 우리 교회의 목표를 ‘더 높은 곳을 향하여’라고 지은 가장 중요한 뜻은 자신의 모습에 대한 바램입니다.

자기 자신의 성장입니다.

더 높은 곳을 향해서 간다는 것은 인생의 관심과 가치가 세상에서 하나님으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생각이 다른 것은 관심이 다른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과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관심을 두는 곳이 다릅니다.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 관심이 세상 사람과 똑 같다고 하면 그것은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관심을 거기에 두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우리의 모든 관심이 세상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관심은 금방 없어지고 오직 하나님께 관심이 쏠리는 것은 아닙니다.

 

사영리전도법에 보면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내 마음의 왕좌에서 나는 내려 오고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왕좌에 앉히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서는 하나님이 왕이 아니라 내가 왕인것 처럼 살아갈때가 더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자리에 계신 분 중에 하나님을 믿지 않으시는 분은 안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기에 주일 마다 이 자리에 나오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관심은 세상 살이에 더 많이 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이 기록된 것은 우리의 현실이 그런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온전하게 살수 있다면 성경을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을 기록하셔서 바르게 살도록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합니다. 자녀를 위해서 라면 모든 것을 다 해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자녀는 어떻습니까? 부모에게 감사하고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있지만 마음과 관심은 친구들에게 더 많이 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부모는 뒷전이 되고 맙니다.

그러다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길러 보면 부모의 마음을 더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중년을 지나고 60이 넘어도 여전히 부모 속을 썩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비슷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여전히 과거의 습관이 남아 있고, 세상적인 욕망도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과 마귀의 끊임없는 유혹과 공격이 있습니다.

갈등이 있고 분노가 있다는 것은 여전히 온전하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 지는 것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관심과 우선권이 점점 주님에게로 옮겨져 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주보 속에 넣어 드린 테레사의 7Mention 도표는 제가 10년 전부터 가끔 우리 성도님들에게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나의 영적성장이 어디에 까지 와있나 돌아 보고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해 주는 지도와 같습니다.

2,3년 전에도 나누어 드렸을 것입니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해서 여러분의 영적성장은 어디에까지 와 있습니까?

 

아빌라의 테레사는 중세시대 최고의 영성가이자 기독교 2천년 역사속에서도 가장 깊은 영성가입니다.

아빌라는 스페인 중부에 있는 고대 도시입니다.

마틴루터가 1517년에 종교개혁을 시작할 당시 1515년에 태어났습니다. 유대인 집안이었는데 개종을 해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된 부모밑에서 자랐습니다. 종교개혁운동이 유럽을 휩쓸고 있을때 테레사는 수도원개혁운동을 했습니다. 십자가의 요한과 같이 많은 수도원을 세웠습니다.

 

개혁이란 무엇인가? 한자를 풀어보면 개(改)는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기(己)와 가볍게 톡톡 두드린다는 복(攵)의 합체 입니다. 그러니까 ‘개(改)’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조금씩 고쳐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혁(革)은 가죽, 곧 겉으로서 옷이나, 자리 등 현재의 상태나 위치를 의미한다. 자신의 내면을 고쳐 가면서 외부적으로 보여지는 것이 ‘개혁’이란 단어의 본래 뜻입니다.

 

사람들은 개혁을 하자고 외칩니다. 다른 사람을 고치고, 세상을 고치자고 외칩니다. 그러나 개혁의 본래 의미는 자신을 고치라는 말입니다.

 

테레사는 엄격한 수도원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생활을 했습니다.

가끔 사람들 중에는 수도원운동을 비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수도원에만 쳐박혀 있으면 복음은 언제 전하나? 세상의 빛과 소금은 언제 되나? 기도만 하고 있으면 되나? 하면서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비판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섭리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말 입니다.

사도 바울이 위대한 일을 했지만 그 뒤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를 응원한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중에는 평범한 농사일을 하시는 분도 있었고, 갈리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도 있었고, 남의 집에서 일을 하는 품꾼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처럼 앞에서 위대한 일은 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평범한 일상생활에 충실하면서 바울의 위해서 기도하고 보쌈돈을 모아서 선교헌금으로 지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냉수한그릇 대접해도 하늘에서 상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전쟁을 할때 앞에서 직접 전투를 하는 군인이 있는가 하면 뒤에서 돕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상당하면 치료하는 의무병도 있고, 밥을 지어주는 취사병도 있습니다. 다리를 놓아 주는 공병도 있습니다. 먼곳에서 지원사격을 하는 포병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활을 하는 사람들은 전쟁의 근처에 가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과학자들이 있습니다. 2차세계대전을 한방에 끝내 버린 것은 과학자들이 만든 원자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봉사를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물질로 지원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앞에 나가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도 중요하지만, 평생 수도원에서 기도만 하는 기도의 사람도 중요한 것입니다.

 

현대는 오히려 수도원적인 영성의 회복이 더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개신교는 그동안 너무 사역에만 치우쳐서 주님과 깊은 관계를 가져야 하는 영성에 있어서 너무 부족합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로 부터 비판을 듣습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이 너무 가볍다. 목사님들이 존경스럽지 않다.. 말을 듣고 있습니다.

 

테레사 아빌라는 평생 수도원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깊은 영적생활을 하면서 신앙인의 영적인 성장이 어떻게 발전해 가는가 하는 것을 연구를 하고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일곱단계로 설명을 했습니다.

 

물론 신앙의 단계가 7단계만 있는 것도 아니고, 100% 이런 과정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과정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성장과 깊이는 관심의 대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인격의 성숙도 그렇고, 신앙의 성숙도 관심의 대상이 옮겨지는 것입니다.

관심이라는 것은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더 좋아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 자신이 목숨처럼 좋아 했던 것들을 ‘배설물’에 비교를 했습니다.

‘아무 미련이 없다’ ‘이제는 더 이상 거기에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어릴때는 자기 중심에서, 친구, 애인, 배우자, 자녀…이렇게 옮겨 가고, 세상 즐거움에서 영적즐거움으로, 그리고 사람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사람들의 말이나 관심은 흥미없어 지고 하나님의 관심만이 중요하게 생각이 되어 집니다.

 

테레사의 7단계도 그와 비슷합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을 때는 모든 관심이 세상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모든 관심이 자기 중심이고 세상 중심입니다.

 

그러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1단계가 됩니다.

이제 하나님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지만 생활은 여전히 세상에 촛점을 두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기 시작하고, 자신을 바꾸어야 겠다는 생각과 노력을 하기 시작합니다.

 

두번째 단계는 하나님에 대해서 확신하게 되고 성경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지만 아직 생활은 세상과 타협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공부와 교회생활을 충실히 하려고 노력 하지만 여전히 세상적인 습관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재물을 의지하고 재물이 있어야 마음이 놓입니다.

나를 보호하는 것이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하지만 실제는 돈이 있어야 든든하고, 사람을 의지하는 마음이더 많습니다.

그리고 세상과 신앙사이에 갈들이 더 깊어 집니다.

 

셋째단계는 세상과 신앙사이에 어느 정도 균형을 가질수 있고 정기적인 교회생활과 봉사생활을 할수 있습니다.

적은 죄까지도 피하려고 노력을 하지만 세속적인 유혹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겸손해 지려고 노력하지만 아직 자만심이 남아 있고 사람들과 갈등과 다툼이 있기도 하고,

여전히 성질을 내고 화를 내기도 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흐트러 지기도 합니다.

 

넷째 단계는 신앙적인 성숙을 이루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순종을 합니다.

균형잡힌 생활과 받기보다 주기를 좋아하고 더 깊은 영적전쟁이 있습니다. 영적인 열매에 대한 갈망과 자신의 곤고함을 더 깊이 자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과의 갈등이 거의 없어지는 단계입니다.

 

다섯째 단계는 일반적인 신앙생활로서는 거의 최고 수준입니다.

오로지 주님만 사랑하고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행함에서 존재로 옮겨가게 됩니다. 말과 감각을 초월해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이해관계를 넘어선 사랑을 할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비난을 초월할수 있습니다.

예배나 봉사가 동일하게 이루어 지고,

Doing 에서 Being 으로 행함에서 존재로 가치관이 넘어가게 됩니다.

마음을 많이 비우고 내려놓고 세상일에 일비일소 하지 않게 됩니다.

영적으로는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깊은 자각을 하게 되고,

Dark Night 의 체험을 합니다.

Dark Night 은 직역하면 ’깊은 어두움‘인데 영적인 깊은 갈등의 시간을 말합니다.

단순한 고난과 고통이 아니라 영적인 번민과 갈등을 포함한 고난과 고통입니다.

 

여섯째 단계는 주님과 깊은 연합의 삶이 됩니다.

모든 삶이 온전히 말씀안에서 이루어 지고 겸손과 순종, 그리고 말과 감각을 넘어 하나님과 교제할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안에서 교제합니다.

기쁨과 고통이 동일하게 느껴 집니다.

기쁜것과 고통스러운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동일하게 느껴질수가 있을까? 신비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아본 어머니들은 비슷하게 느낄수 있을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은 엄청나지만 한편으로는 또 하나의 생명을 낳는 기쁨을 느낄수가 있습니다.

 

Dark Night 은 모든 단계에서 체험이 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높은 단계로 갈수록 Dark Night의 갈등도 커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빛가운데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빛난 얼굴을 쳐다 보지 못했듯이 하나님은 완전한 빛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그 빛에 다가 가면 갈수록 인간의 어두운 면이 더 드러나게 됩니다.

그 빛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자신의 부족함과 죄성이 더 아프게 느껴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면 어떤 인간도 그 빛에 다가 갈수가 없습니다.

 

일곱째 단계는 주님과 완전한 연합입니다.

모든 것에서 자유하고 Dark Night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온전히 하나님 중심의 삶이 됩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기쁨과 평화가 충만하게 됩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을 아들을 믿는 믿음 가운데 사는 것이라..

거의 작은 예수 수준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에서 안타까운 현실 가운데 하나는 이런 깊은 영적성장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사역에 촛점두고 있습니다.

성도님들은 모였다 하면 하는 이야기가 교회가 이러니 저러니, 행정이 이러니 저러니, 남 이야기나 하고 허물이나 지적합니다.

자신의 내면의 허물을 부끄러워 하지 못합니다.

목사님들은 설교잘해서 인기있는 목사가 되고 싶어 하고, 선교를 많이 해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한다는 평가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것은 은사입니다. 사역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은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열매는 내면의 열매입니다.

성경에는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5:22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성, 충성, 온유, 절제 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는 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기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어떤 상태입니까?

태어날때 부터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마음도 삐뚤어 지고, 마음속에 분노가 있고, 원망이 있습니다.

미움, 시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욕구가 있고, 세상적인 습관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 하나 고쳐갈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룰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성숙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 말씀과 기도와 연단과 그리고 교회생활입니다.

교회는 예배를 드리는 곳이기도 하지만 영적인 훈련소입니다.

(히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영적훈련속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말씀과 기도생활입니다.

말씀도 같은 말씀을 반복해서 읽다 보면 점점더 깊이 깨달아 지게 되듯이, 기도 역시도 점점 더 깊은 기도를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 처음 시작할때의 기도는 자기 중심적인 기도입니다. 어린아이가 자기가 필요한 것을 달라고 떼를 쓰듯이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정기적인 기도생활이 아니라 필요할때만 하는 기도입니다.

 

세상에서도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기도생활을 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슬렘들이 하루 다섯번 기도하시는 것을 모두 아실것입니다.

그들은 그 시간만 되면 하던 일을 중단하고 기도를 합니다.

그 시간에 오래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잠깐 기도 합니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그 기도의 시간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시간을 지킨 다는 것은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 기도를 더 많이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성경은 기도를 가장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롬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골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것은 주님을 향한 열망이 있어야 가능 한 일이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이 있어야 기도할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열망이 얼마나 있습니까?

여러분의 관심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과 연합하는데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주님은 ’바지사장‘으로 있습니까?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24시간을 같이 있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24시간을 같이 있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이 방문했을때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드리려고 분주 했습니다.

마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넘치듯이 마르다도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봉사하는 것 보다 예배드리는 것을 더 좋아 했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만들던 마르다가 보니 마리아는 음식은 안만들고 예배실에 앉아 있습니다.

불평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마리아를 꾸중해서 자기와 같이 음식을 만들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니 그냥 두라고 했습니다.

 

마르다는 음식을 만드는 것을 주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주님을 더 사랑했는가? 그것은 주님이 아실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예수님에게 옥합을 깨뜨려 바친 사람은 마리아 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때 마지막 까지 같이 했던 사람도 마리아였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봉사하는 일때문에 예배를 소흘히 하는 그런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건강하면 음식이 끌리고 속에 탈이 나면 음식생각이 없어 지는 것 처럼 영적으로 건강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말씀과 기도에 더 끌리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깊은 기도생활을 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미국에 와서 처음 다닌 교회가 LA에서도 제일 기도를 뜨겁게 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기도생활부터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는 다니엘 기도를 매일 했습니다. 한시간씩 세번하고, 특별한 일들이 있으면 한시간식 다섯번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교회가 제일 어려웠을때 깊은 기도를 해 보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루 종일 한시간 성경읽고 한시간 기도하고.. 그렇게 하다가 어느 금요일에 새벽기도를 하고 났는데 오늘은 하루종일 기도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9시 부터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저도 몇시간이나 할지 정해 놓지 않았습니다.

통성기도로 기도를 시작했는데 점심때가 지나고 저녁 5시까지 그 자리에서 8시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기도를 하고 났더니 영혼에 충만한 평안이 찾아 왔습니다. 마치 세수만 하다가 스파에 가서 하루 종일 사우나를 한것 처럼 영혼에 모든 찌꺼기들을 다 걸러낸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주 매주 금요일은 온종일 기도하는 날로 정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제가 금요일 온종일 기도하니까 교우들 중에서도 나와서 기도하시는 분들이 생겨 났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장시간을 기도해 본적이 없으신 분들도 4시간 정도는 기본으로 하고 하루 종일 하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루종일 하는 기도를 일년 이상 계속하다 보니 영혼에 큰 평안과 자유함이 생겼습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날개를 달은 듯한 느낌.. 그리고 영혼이 깃털 처럼 가벼워진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높이 올라가면 이 땅에 있는 것들 점 처럼 조그 많게 보이듯이, 인생사가 그렇게 별거 아니게 보였습니다.

 

목회를 처음 할때는 성도들을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성도들을 고쳐 주고 싶어 했습니다. 말씀으로 지적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제는 옆에서 버팀목, 그늘이 되고 주고 싶습니다. 제가 가끔 표현하는 말이지만 동구밖에 정자나무가 되고 싶습니다.

지나 가는 나그네들이 잠시 앉아 쉬어 가고, 여름날 사람들이 뜨거운 햇살을 피해서 쉴수 있는 나무 함께 하는 사람들에 쉼이 될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졌습니다.

 

지적하기를 좋아하고, 성질내는 사람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스트레스 주지 않았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이 야단친 사람들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너희들은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는 인간들이다..

그래서 야단 치셨습니다.

밑바닥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따뜻하게 품어 주셨던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것은 지구의 엄청난 중력 때문입니다.

우주선이 지구의 중력을 이기고 우주로 날라 갈때는 엄청난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성도 그렇습니다.

육신의 생각과 정욕도 그렇게 강합니다.

왠만한 힘으로는 그 정욕의 힘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변하기 어려운 것은 죄의 습성이 중력만큼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힘으로만이 옛사람을 벗어 버릴수가 있습니다.

그 옛사람을 벗어 버리는 것은 강력한 기도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다니엘은 애급의 총리로 모든 사람들의 시기와 멸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해야 했고, 틈을 보이면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누구 보다 더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쁜 가운데서도 기도의 시간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생명을 걸고 지켰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시간을 책임져 주셨습니다.

 

아이들기르고 세상에서 일할때는 말씀과 기도에 충분한 시간을 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말씀과 기도의 생활을 위해서 몸부림 쳐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어야 하고, 잠도 자야 하는것 처럼 말씀과 기도의 생활을 꼭 해야 겠다고 마음먹으면 시간을 뺄수가 있습니다.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할수 있어야 세상속에서 성도로서 승리하며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잠언 말씀에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자 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가정, 사회, 직장, 친구.. 신경써야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정하고 관리를 하지 못하면 영적전쟁에서 이기지 못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항상 우선으로 하셔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날로 더 깊어 질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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