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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야기(11) 인생의 짐

복음이야기(11) 인생의 짐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얼마전에 한국에서 다큐영화로 상영되었던 ‘워낭이야기’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40년을 살아온 어느 ‘소’의 이야기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이 소를 통해서 자녀들 교육 다 시키고 평생 함께 살아왔습니다.

 

‘소’만큼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짐승은 없습니다.

소는 농사를 도와 줍니다. 그리고 우유를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으로 인간이 즐겨 먹는 음식이 되어 줍니다.

안심, 등심, 소머리, 소뼈, 소꼬리, 내장까지 어느 한부위를 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온 몸을 인간을 위해서 다 내어주는 것이 소입니다.

‘소’하면 또 연상이 되는 것이 무거운 짐입니다.

하루종일 일만하고, 일하고 돌아올때 모든 무거운짐은 다 소에게 지웁니다.

그래서 힘들게 살아가는 인생을 소에다 비유를 합니다.

‘소’처럼 인간을 위해서 힘들게 살면서 희생하는 짐승은 없습니다.

 

‘소’만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평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소는 육체적인 짐을 지지만, 육체적인 짐보다 더 무거운 짐이 정신적이 짐, 영적인 짐입니다.

 

정신적인 짐이 무엇입니까? ‘책임감’입니다. ‘사명감’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모든 문제들이 무거운 짐입니다.

‘가정’을 책임지고, ‘사업’을 책임지고, ‘나라’를 책임지고, ‘교회’를 책임지고, 나에게준 사명을 책임지고… 하는 모든 책임들이 ‘무거운 짐’입니다.

 

인생의 짐을 느끼는 것은 같은 식구라도 다릅니다.

아버지가 느낀는 짐의 무게와 어머니가 느끼는 짐의 무게가 다릅니다. 여자가 느끼는 짐의 무게와 남자가 느끼는 짐의 무게가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수명이 짧습니다. 남자들이 술, 담배를 많이 하고 거친 인생을 살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인생의 짐을 더 무겁게 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같은 형제라도 짐의 무게가 다릅니다.

장남이 지는 짐과 다른 형제들이 지는 짐의 무게가 다릅니다.

장남이 그 짐을 지지 못하면, 형제중에 누군가가 그 집안의 짐을 지게 됩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무렵에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가정이 어려워 졌습니다. 저는 차남이지만 형제들의 형편을 보니 제가 가정의 짐을 져야 할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유학을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짐이 벗겨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짐’이 훨씬 더 많아 졌습니다.

 

주위에 목사님들 보면 부러운 생각이 들때가 가끔 있습니다.

식구들이 모두 예수믿는 가족들이라면 신학교들어갈때 응원해 주고, 학비도 가족들이 도와 줍니다. 기도해 줍니다.

 

그런데 저는 저희 집에서 처음 예수를 믿는 데다가, 모두가 원치 않는 목사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응원은 커녕 비난을 받아야 했고, 모두 예수를 믿지 않으니 기도후원도 받을수 없고, 학비도 제가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가족들을 도와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모든 짐을 제가 다 지어야 했기에 가족들의 후원을 받는 목사님들을 보면 부러운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짐을 벗어버리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짐을 지는 것이 힘든것이지만,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의 형편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형편에 맞게 넉넉하게 도와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부모,형제들의 짐을 졌습니다.

모세는 모든 이스라엘백성들을 출애급해야 하는 짐을 졌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전쟁을 해야하는 짐을 졌습니다.

다윗은 통일왕국을 완성해야 하는 짐을 졌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짐을 지셨고

제자들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짐을 졌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 그만큼 짐도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축복을 받기를 소망하면서도 그것이 또한 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남에게 짐이 되는 사람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힘들어도 남의 짐을 져주는 사람이 좋겠습니까?

 

오늘날 현대인들은 남의 짐도 져주지도 않고, 짐이 되기도 싫어 합니다. 그것를 개인주의라고, 이기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 것은 짐을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경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왜 힘이 드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 이런 짐들에 눌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짐을 벗어 버리고 싶어합니다. 도망가 버리고 싶어 합니다. 한국에서는 자녀들이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면 이혼하는 가정들이 많다고 합니다.

요즘은 또 황혼이혼이라는 것 까지 유행을 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클때까지 이를 악물고 참았다가 아이들이 크고 나면 더 이상 참지 않고 짐을 벗어 버리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었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해는 하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인생의 짐은 벗어 버릴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벗어 버리고 도망가 가면 벗어 버리는 그 순간은 홀가분한것 같지만 벗어버린 짐은 또 다른 짐으로 변해서 계속 괴롭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까지 짐은 옮겨 가게 됩니다.

그렇게 돼서 이 세상은 점점 더 무거운 짐으로 가득차게 되고, 세상은 더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인생의 짐은 절대 벗겨지지 않습니다.

인생의 짐을 벗어 버릴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화배우 리차드 기어가 불교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찾아가서 자신의 결혼문제를 상담받았습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 짐이 그렇게 무겁거든 벗어 버리시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벗어 버리면 안됩니다. 끝까지 져야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끝까지 질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고, 그 짐이 고통이 아닌 행복이 될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능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복음안에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초청합니다. 내게로 오라는 것입니다.

내게 오면 그 짐을 가볍게 할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 복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게 와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숭이의 자손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냥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 창조하셨고, 인생은 하나님이 디자인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땅에 태어난 것도 그냥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미국땅에 와서 사는 것도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 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회에 오셔서 자리에 앉아 계신것도 우연히 된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로 된 것입니다.

 

인생의 짐이 무거운 것은 불안과 걱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확실한 것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를 간단히 풀수 있는 전능자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리고 그분이 나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면

상황이 달라지는 것인입니다.

 

인생의 많은 짐과 문제 그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어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도 고민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로서는 해결할수 없기에 어렵게 느껴질것입니다.

고민으로 느껴 질것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어른에게 가져오면 그 문제는 아무 어려움도 되지 않습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100불이 없어서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돈이 있는사람에게는 그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인생의 어려운 문제도 예수님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문제를 풀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 졌습니다.

인생의 가장 기쁜날에 잔치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문제를 당장에 해결해 주셨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5천명이 넘는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 배를 주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12광주리가 남게 해 주셨습니다.

 

38년된 병자는 평생 질병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습니다.

12년된 혈루병여인은 그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 가잔 재산을 다 팔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실로암의 소경은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고 구걸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사마리아여인은 결혼을 5번이나 하면서 행복을 찾았지만 갈수록 더 불행해 졌습니다.

이들은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평생져야할 무거운 짐이 단번에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신다고 해도 세상에는 여전히 많은 또 다른 짐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짐은 없애는 것 뿐만 아니라,

짐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 짐을 가볍게 할수 있는 길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도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짐은 가볍다고 했습니다.

짐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가볍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게 배우라고 했습니다. 짐을 무겁게 지지 않고 가볍게 질수 있는 법을 배우리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그 것을 배울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두 번째로 예수님께 가서 배울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인생의 짐과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상관이 많이 있습니다.

인생의 짐이 무거운 것을 불안과 걱정 때문입니다.

나를 보호해 주는 분이 있다는 것을 알면, 그리고 나는 그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면 불안과 걱정은 사라질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머니의 품에 안겨만 있으면 풍랑이 불어도 평안히 잠을 잘 잘수가 있듯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품안에 있으면 인생의 풍랑이 불어도 평안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이것은 존재 Being 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하나님앞에 존귀한 자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Being을 발견하는 길입니다.

 

신앙은 원래 ‘존재’를 찾아가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이냐? 나는 어디에서 왔느나? 하나님은 누구인가?

이것을 고민하고 자신의 존재를 찾기 위해서 시작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과거에는 그랬습니다. 신앙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가고 노력하는 것이 ‘존재’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천로역정’ 같은 위대한 책도 존재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도 자신을 찾아는 내용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찾을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창조하고 만드신 하나님을 만날 때 자신의 존재를 알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면 자신의 존재를 알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자신의 생년월일이 언제인지, 자신의 성이 무엇인지.

자신의 형제가 누구인지 알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80년 들어오면서 세상은 급격한 과학의 발달로 산업화가 이루어 졌습니다.

한국도 80년대 중반부터 상업주의가 교회전반을 지배하고, 교회에 까지 그 상업주의가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인 존재를 찾기 보다는 ‘사역’에 몰두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사역이 되어갔습니다.

 

성경공부하는 것도 사역, 전도하는 것도 사역, 구제하는 것도 선교하는것도 사역, 찬양하는 것도 사역화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직자’라고 더 이상 부르지 않고 ‘사역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교회를 찾는 목적도 나를 찾기 위해서 교회를 가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좋은 프로그램을 위해서, 교제를 위해서. 설교를 듣고 은혜받기 위해서 가고 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회는 커지고, 사역은 많이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은 찾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인생의 짐은 더 무거워 지고,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존경받는 목회자, 존경받는 장로님, 존경받는 권사님이 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존재자체가 존경받는 사회였습니다.

부모라는 존재, 목사라는 존재, 장로라는 존재,

선생님이라는 존재자체만으로도 존경받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존경받는 사람도 없고, 존경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존재의 가치를 잃어 버리면 쉼이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없습니다.

 

자녀들이 공부를 잘해서 일류대학을 나와만이 귀한 것입니까?

부모가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어야만 귀한 것입니까? 남편이 돈을 잘 벌어 와야 귀한 것입니까?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의 가치를 알면 함부로 비판을 할수 없습니다.

‘한영혼’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존재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행함’이나 ‘능력’으로 가치를 판단하기 시작하면 사람의 등급을 매기게 되고, 평가를 하게 되고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비난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세리를 비판했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비판했습니다. 사마리아여인을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은 따뜻하게 받아 주셨습니다.

왜요? Being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버림 받은 사람들과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들을 행함으로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행함’으로 하면 어떤 사람도 하나님앞에 온전할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앞에 설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하나님은 죄인된 인간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주실 만큼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가치 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은 늘 평화롭습니다. 서로 허물을 지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나 집사람이나 인간인데 왜 허물이 없고, 실수가 없겠습니까? 그런데 왜 안싸웠느냐?

doing으로 보지 않고 Being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Doing으로 보면 지적할것 투성입니다. 싸울일이 태산같이 많습니다. 저희 교회도 싸우지 않고 평안하게 왔습니다.

 

행위로 하면 하나님앞에 설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습 그대로 주앞에 나오라고 하십니다.

부족하고, 실수 많고, 모자란 모습 그대로 나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앞을 가로 막고 서서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하나님도 화를 내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앞에 열을 내고 큰소리 치고 하면 되겠습니까?

인생의 짐이 무거워 쉼을 얻으려고 교회에 나왔는데

하나님도 어서 오라고 반겨 주시는데 인간이 그 앞을 가로 막고 서서 열을 내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세상은 정죄해도 하나님은 괜찮다… 하십니다.

제가 말하면 여러분은 ‘괜찮다’하시면 됩니다.

성가대 화음이 안맞아도.., 음식이 간이 안맞아도.., 파킹이 불편해도.., 좀 지저분해도…

 

그렇다고 다 괜찮은것은 아닙니다.

이번에는 ‘안괜찮다…’ 주일날 빠지면.., 기도안하면,,,

성경안읽으면..,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열매를 구하십니다. 크리스챤들이 바른 행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존재입니다.

그리로 그 존재를 바탕으로 해야 바른 행위가, 바른 열매가 맺어 질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지으신 주님 내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내가 어딜 가든지 날 떠나지 않죠

내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때 그가 들으시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짐을 벗어 버릴수가 없습니다.

한가지 길은 짐을 가볍게, 그리고 즐겁고 행복하게 짐을 지는 길이 있습니다. 그 능력이 복음안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안에 그 길이 있습니다.

그 능력을 가질때 이 땅에서도 천국을 이루며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짐을 벗으려고 하면 더 무겁습니다.

 

학생이 학교의 짐을 가볍게 하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군대생활 좀더 쉽게 하려면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직장생활 좀더 쉽게 하려면 기쁨으로 창조적으로 해야합니다.

신앙생활 쉽게 하려면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편하려고 하면 편해지지 않는 것이 인생입니다. 적극적으로, 창조적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할때 짐은 짐이 아니라 행복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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