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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야기(13) 행복한 사람

복음이야기(13) 시23:1-6 행복한 사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세상에 제일 많은 주제가 ‘행복’에 대한 주제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다닙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곳을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행복이 진짜 행복이 아닐때가 더 많다는데 있습니다.

 

제가 20대 초반 한국에서 학교 다닐때 여러번 읽었던 책가운데 영국의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라고 하는 버틀랜드 러셀이 지은행복의 정복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저는 그책을 5번을 읽고 6섯번째 던져 버렸습니다.

책의 전반부에는 인간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해 갑니다. 그 설명을 읽을때는 정말 맞는 말이다.

그의 분석에 대해서 감탄을 하면서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분석이 끝나고 어떻게 하면 행복할수 있는가에 들어가서 그의 대답은 ‘행복해 지려면 불행하게 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 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대답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가 5번을 읽고 나니까 이거 순 엉터리다 하는 것을 깨닫고 책을 던져 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불행한 것이 몰라서 불행해 지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알면서도 불행한 일을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모두가 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 행복을 찾아서 고향을 떠나 태평양을 건너 미국까지 왔습니다. 이렇게 멀리 까지 왔는데 반드시 행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떤 상태가 가장 행복한 상태이며, 어떻게 이 행복을 가질수가 있겠습니까?

과학은 발달하고 세상은 편해지고 있지만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을 사람들은 느끼고 있습니다.

 

한때 한국에서 유행했던 죠크가운데 참새씨리즈가 있습니다.

전기줄에 참새한쌍이 앉아 있었습니다. 포수가 총을 쏘니까 암놈이 맞아서 떨어집니다. 떨어지면서 하는 말이

50년대에는 ‘부디 몸조심하시오’

60년대에는 ‘먼저가서 미안하오’

70년대에는 ‘내몫까지 살아주오’

80년대에는 ‘아무리 급해도 장례는 치러주고 새장가 드시오’ 라고 했습니다.

90년대에는 IMF를 겪으면서 ‘혼자 욕좀 보시오’ 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현대는 산다는 것이 오히려 더 고역스럽게 여겨지는 시대, 산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그런 시대속에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생해서 자식을 길러 보아야 그렇고, 좋은 집에 살아 보아야 그렇고, 좋은 학교를 나와 봐야 그렇고..

옛날 어려웟던 시절에는 좋은 학교 나오고, 좋은 집에 살면 행복 할것이라는 그런 꿈이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하던 것을 막상 이루고 나니 그것도 그저 그런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행복이란 무지개처럼, 아지랑이 처럼 영원히 가질수 없는 꿈같은 것입니까?

우리에게 소망이 없는 것입니까?

모든 인간의 노력이 허무한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제가 이시간 여러분에게 행복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행복’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진정한 행복’을 찾을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최고의 사상가의 책에서는 찾을수 없었던 그 행복을 저는 다른 곳에서 찾았기 때문에 이시간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었던 성경말씀은 인류역사에 가장 유명한 시요, 말씀입니다.“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라도 조금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예수 믿기도 전에 어느 TV 드라마에서 들었습니다. 70년대에 초원의 집 Little house on the Prairie(미시시피+로키산맥사이 대평원) 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잉걸스‘란 사람이 아내와 딸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야기 였습니다. 한 에피소드 중에 지금까지 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습니다.

잉글스의 딸이 열병에 걸려서 위독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때 잉걸스는 딸아이 방 앞에 서성 이면서 시편 23편을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시편 23편은 3천년전에 이스라엘 땅에 살았던 다윗이란 사람의 고백입니다.

다윗은 중국의 진시황보다 700년 전이고, 공자와 인도의 석가모니 보다도 500년 전의 사람입니다.

 

석가모니가 다윗의 이 고백을 들었고, 그 진리를 배웠더라면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행복을 찾아 보리수 나무 밑으로 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상태: 그것이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가진 사람이 더 가지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 가운데 이런 명언이 있습니다.

①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모든 사람에게 항상 배우는 사람이다.

②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③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현실의 환경을 바꿔 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 그래야 발전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금의 환경이 변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만족하지 못할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인생을 세종류의 사람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미 행한 과거의 자기의 행위 매여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과거에 행한 실수, 실패에 대해서 매여있습니다.

또 과거의 성공에 매여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때가 좋았지 하면서 그때를 늘 생각하는 것도 과거에 매여 있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미래에 매달려 사는 사람입니다.

오로지 미래만, 앞에 좋은 일이 있을거라고, 이상주의자들과 같이 무지개를 쫓아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현재에 만족하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옥에 갖혀 있으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빌 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저는 이 말씀을 신약의 시편23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구약의 다윗만큼이나 위대한 신앙인이었던 바울은 똑 같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사람의 상황은 전혀 다른 상태였습니다.

다윗은 왕의 자리에서 한 고백인 반면에 , 바울은 최악의 장소인 감옥에서 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왕의 자리나, 죄인의 자리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삶은 겉으로 화려해 보여도 사실 다 비슷비슷한 것입니다.

 

돈이 많으면 고통이 사라집니까? 돈이 없어 당하는 고통은 사라질지 모르지만, 돈이 많으므로 인해서 생기는 또 다른 고통이 또 있습니다.

권세가 없으면 약자로서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권세를 가지면 권세가 몰고 다니는 더 큰 고통이 있습니다.

 

사람이 만족함을 느끼는 것은 두가지 일때 가능합니다.

첫째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을때 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잠깐의 만족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전능한 분을 믿을때 입니다.

다윗이 오늘 고백하는 것은 두 번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다윗은 어릴적에 양을 치던 목자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양과 목자의 관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자가 양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어릴지라도 양을 지키기 위해서 밤을 새고, 사자나 곰이 나타나면 그 무서운 짐승들과 싸웠습니다.

목자는 양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도 아까워 하지 않는 것을 본인이 체험해서 알고 있습니다.

양은 목자만 잘 만나면 아무 걱정할 것도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목자는 양이 조금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도록 모든 것을 준비하는 것이 목자의 직업인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선한 목자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목자로 삼은 사람은 아무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내일 먹을 것 걱정할 필요도 없고, 쉴만한 곳을 걱정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에 힘들게 내가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을 잘 아는 다윗이었기 때문에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나는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라는 고백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 시편의 핵심의 핵심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단계에서 해석하고 끝내고 맙니다.

다윗이 말하는 진정한 행복, 진정으로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그것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도 자족하고 만족할수 있는 그 이유는 또 다른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것을 채워주셔서 자족하고 행복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깨닫고 배워야 진정한 행복, 어떤 환경에서도 행복할수 있는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두 마리의 양이 있었습니다.

첫번째 양은 푸른 초장에서 쉴만한 물가에서 지냈습니다.

필요한 모든 것이 늘 있었습니다. 목자가 늘 지켜 주었습니다.

천국처럼 살았습니다. 양은 행복했습니다.

나는 어느 양보다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손에는 평소의 막대기와는 달리 가위를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붙잡더니 사정없이 자신의 탐스러운 털을 다 깍아 가는 것입니다. 또 어느날은 나타나더니 통을 들고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우유를 다짜가 버리는 것입니다.

양은 분노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나를 잘먹고 잘 쉬게 해 주더니 알고 보니 나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목자가 나를 이용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을 알게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착취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때 부터는 그 좋은 풀밭도, 쉴만한 물가도 천국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주인이 손에 칼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자신의 새끼양중에서 제일 토실토실하고 사랑스러운 새끼를 골라서 죽이는 것입니다, 각을 뜨고 온몸을 갈갈이 찢어서 불태워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아니 이럴수가 어미양은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푸른초장이 초장이 아닙니다. 쉴만한 물가가 쉼을 주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양은 감옥같이 느껴 집니다.

나는 그저 주인이 필요할 때 털을 주고, 우유를 내어 주고, 마지막에는 죽어서 제물이 되든지, 아니면 한끼 식사꺼리 밖에 안되는 소모품이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양의 인생에 행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는것이나 죽는 것이나 뭐 다를바가 없는 그런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른 양이 있었습니다

이 양은 혼자 길을 잃고 광야를 헤메이게 됩니다.

양은 빠른 다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멀리 바라볼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는것도 아니어서 어디로 가야할지도 몰랐습니다.

발달된 코를 가지고 있어서 어디에 풀이 있는지, 어디에 물이 있는지 냄새를 따라 갈수도 없었습니다.

냄새를 잘 맡을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을 지킬수 있는 어떤 힘도 없었습니다.

 

길을 잃은 양은 이리저리 헤메이면서 점점 더 깊은 광야로 들어 가게 됩니다.

배는 고파 죽을 지경입니다. 점점 살은 빠져 갑니다.

뼈만 남은 앙상한 몰골이 되었습니다. 그 어디에도 푸른 초장은 보이지 않고, 물소리도, 물냄새도 맡을수 없습니다.

가시에 찔려서 살은 터지고, 영양실조에 온몸은 부스럼으로 뒤덥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늑대들이 나타났습니다. 이제 불쌍한 양은 늑대들의 밥이 되어 고통스러운 삶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침을 흘리며 다가오는 늑대를 보며 불쌍한 양은 자신의 살아온 과거가 순간적으로 흘러 갑니다.

 

좋았던 순간도 많았지만, 후회되는 일들이 더 많았습니다.

이제 저 늑대놈의 밥이 되는 구나 생각하니 자신의 처지가 더 없이 처량하게 느껴 졌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덤벼들려고 하던 늑대가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살기가 등등했던 늑대는 꼬리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달아나 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해서 주위를 돌아 보니 자기 뒤에 목자가 막대를 들고 서 있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을 안아 들고 집으로 데려가 정성껏 씻어 주고, 상처난 부분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푸른 풀을 뜯어다가 먹여 주었습니다. 양은 점점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전 보다 더욱 건강해졌습니다.

양은 고생과 죽음에서 살아난 것입니다. 양은 생각합니다.

자신을 살려준 주인을 위해서 살리라 생각합니다.

주인을 위해서 기쁘게 털을 제공합니다. 매일 같이 우유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주인이 칼을 들고 나타날때도 그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습니다.

 

이것이 시편23편의 깊은 의미입니다.

 

다윗은 수많은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하나님의 은혜를 잊을수 없습니다.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시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다윗의 마음속에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나의 존재는 주님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라는 고백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인생이 왜 비뚤어 집니까? 왜 막가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은혜를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땅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많은 은혜를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그 은혜가 없었더라면 지금 존재할수도 없습니다. 그 은혜가운데 최고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만났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나의 모든 욕구를 채워 줄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다니는 사람은 평생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저의 욕구를 찾아서 미국에 왔습니다.

미국이라는 광야를 천국으로 착각하고 온것입니다.

이곳에서 목자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존재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어떤 인생이 가장 행복한 인생인가를 찾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은 나의 모든 인생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은 그분을 만날 때 찾아 옵니다.

많은 돈을 가지고도 쓸곳을 찾지 못한 사람은 늘 돈 때문에 불안합니다. 어디다 숨길까, 누가 훔쳐가지 않을까,

어떻게 돈을 더 늘릴까 돈이 행복이 아니라 짐이 됩니다.

그러나 어디다 쓸곳을 정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사람들은 이시간에도 광야에서 행복을 찾아 헤메고 있습니다. 태평양을 건너 미국까지 왔지만 여전히 그 행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을 찾아야 행복한 것입니다.

나를 창조하신 분을 만나야 행복한 것입니다.

 

인간이 불행해진 근본원인을 알고 그것을 해결해야 행복해 질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죄 때문에 인간은 불행해 졌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베풀어 주신 ‘구원의 길’입니다. ‘행복의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믿을 때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있습니다.

심판에 이르지 않고 영생을 누릴수 있습니다.

이땅에서도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어 주셔서 죄를 이기고 불행을 이기고 더 행복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이러한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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