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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야기(6)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

복음이야기(6)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 사61:1-7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외인은 서서 너희 양 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너희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몫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그들의 땅에서 갑절이나 얻고 영원한 기쁨이 있으리라

 

어느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시험 문제로 ‘결심을 하지만 사흘을 가지 못하는 경우’를 가르쳐 고사성어 네 글자로 괄호를 완성하라는 문제를 냈다고 합니다.

정답은 물론 ‘작심삼일’이지요.

그런데 한 학생이 쓴 답이 ‘작은 삼촌’ 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왜 그렇게 답을 썼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작은 삼촌은 늘 담배 끊는다고 결심하지만 사흘을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더랍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작심삼일’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가 있습니다. 고통이 오면 하나님을 찾다가 조그만 숨쉴만 하면 하나님을 떠나는 일을 수도 없이 반복해온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그랬고, 가인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노아의 홍수로 온 인류가 죽임을 당하는 심판을 받았지만 인간들은 또 하나님을 대적하고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계속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다시 인간을 구원할 일을 계획하셨습니다. 그 아브라함의 집안역시 우상 만드는 일을 하는 집안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가나안땅에 갔다가 요즘 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워 지니까 애급으로 다시 도망가 버립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패가 망신하고,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애급에 팔아 넘깁니다.

400년만에 노예생활에서 탈출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가지만 12명의 사사가 세워집니다.

12번의 사사가 세워졌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반복해서 대적했다는 것입니다.

 

초대왕 사울이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다윗의 때에 가장 나라가 번성하지만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왕이 되었지만 솔로몬도 말년에는 온갖 우상을 다 섬기게 됩니다.

솔로몬이 죽자 나라는 두 개로 쪼개어 지게 됩니다.

북쪽의 이스라엘왕국과 남쪽의 유다왕국으로 나누어 지게 됩니다.

여로보암으로부터 시작된 북쪽 이스라엘왕국은 19명의 왕으로 망하게 됩니다.

르호보암의 남쪽 유다왕국은 이스라엘왕국보다 130년 더 길게 이어지면서 20명의 왕이 바꿔지고 예수님오시기 586년 전에 나라는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날 때 마다 찾아 오는 것은 고통이었습니다.

기근이 들고 질병이 생기고, 그리고 이웃나라가 쳐들어 왔습니다.

고통이 오면 잘못했다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또 도와 주십니다. 잠깐은 감사하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것 같습니다. 그러다 숨통이 트이면 또 딴 생각을 하고 세상의 쾌락을 따라 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우리 속에도 잠재되어 있는 죄악의 속성입니다.

인간은 숨쉴만 하고 편하면 금방 딴생각 합니다.

모든 것이 안정되고 편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이렇게 수백번 반복되는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하나님을 떠나면 고통이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면 멸망이 온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으면 산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수십번 실수를 하고 하나님앞에 잘못을 해도 회개하고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은 용서해 주시고, 회복시켜주시고

일으켜 주시는 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사 61:4)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오늘 본문 속에서 볼수 있는 것은 폭풍이 쓸고간 것 처럼, 전쟁후에 페허가된 나라의 모습을 볼수가 있습니다.

선지자들의 경고를 외면하고 나라는 망하고 폐허가 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이속에서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절망속에서 하늘만 쳐다 보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멸망의 길을 가는 때에도 언제나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생활하는 가운데서도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가운데서도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다시 구원의 불길을 일으키시고

나라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멀리하는 다수의 사람들에 속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편에서서 시대를 구원하는 사람에 속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편에 서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인용하여 말씀하신 복음의 핵심입니다.

세상에 이것 보다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중에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오늘 본문속에서도 볼수 있는 것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을 볼수가 있습니다.

일으켜 세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오늘도 나와서 예배하고, 다음주도 나와서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 평생 갚아도 다 갚을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이런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까?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이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도, 신약성경에도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하나님의 이 사랑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인물가운데서 가장 비참하게 몰락한 인물이 누구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입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함께 영광스러운 여정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장차 온 인류의 축복의 조상으로, 믿음의 조상으로 축복해 주실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땅을 주시고 거기에서 믿음의 나라를 세울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받는 축복을 일차적으로 누릴수 있는 혜택을 받은 사람이 롯입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의 양떼가 많아지니 롯의 양떼 역시도 많아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식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롯을 자식삼아 사랑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것이 롯의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소유가 너무 많아져서 종들끼리 서로 싸우니까

아브라함이 롯으로 하여금 먼저 좋은 땅을 차지해서 나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축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을 떠나가자 불행한 일이 생겼습니다. 롯이 재물이 많은 것을 탐낸 지역 사람들에게 다 빼앗겨 버리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은 자신이 기르던 사병 317명을 데리고 밤새 쫓아 가서 다시 빼앗아 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입은 롯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할 때 모든 재산 다 잃어 버립니다. 따라 나오던 아내는 뒤돌아 보다 소금기둥이 되어 버립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롯과 두딸은 동굴에서 살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한 문화를 배우고 자란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아버지와 동침해서 자녀들을 가집니다.

그 후손이 모압과 암몬입니다.

명예스러운 아브라함의 가문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가문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 많던 재산 다 잃어 버렸습니다.

롯의 가문은 완전히 몰락해 버렸습니다.

얼굴을 들고 다닐수 없습니다.

이런 롯의 가문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가문으로 어떻게 재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롯의 가문에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롯의 가정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어떻게 회복시킵니까? 기가막힌 하나님의 섭리로 롯의 가문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임하게 됩니다.

 

사사시대에 베들레헴에 흉년이 드니까 유다자손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정이 모압땅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압여인을 며느리로 삼게 됩니다.

그 며느리가 룻이라는 며느리입니다.

이름도 하필 룻입니다. 롯인지, 룻인지 헤갈립니다.

 

롯의 자손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가문과 롯의 가문이 사돈이 되는 것입니다.

이 룻이 나오미와 함게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되고, 보아스를 만나서 재혼을 합니다.

그리고 이새라는 자손을 얻게 되는데

다윗의 아버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몰락해 버린 룻의 가문을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다자손을 만나게 하셔서 아브라함의 자손과 룻의 자손이 만나 다윗이 태어나고, 그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의 여정을 떠났다가 중간에 몰락해 버린 롯이지만, 하나님은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까?

 

한번 선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끝끼지 붙잡아 주시고 일으켜 세워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지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수 없도다

할렐루야,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저주의 사슬을 끊어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신약성경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병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분은 평생을 질병의 고통속에 살았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남자의 평균연령이 50도 안될때 였습니다.

100년전만 해도 미국의 남성들의 평균연령이 50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한국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래서 60세 환갑이 되면 큰 잔치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비하면 50이 넘으신 분들은 지금 엑스트라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감사하면서 살아야 할줄 믿습니다.

이만큼 살아온 것에 감사하며 좋은일 많이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베데스다연못가의 환자는 38년을 질병의 고통속에 살았습니다.

그의 삶이 얼마나 처절했을까 상상이나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그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들 얼마나 더 살수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사람이기에 마지막 꺼져가는 등불속에서도 생의 애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아무리 나이가 들고, 아무리 오래 질병으로 고통을 받아도

마지막 까지라도 지푸라기를 잡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의 마음에 다시 한번 불을 붙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38년의 한을 풀어 주셨습니다.

 

38년만에 질병에서 해방된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치료받지 못했던 그의 병이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치료된 것입니다.

제발로 걷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순간에 자리를 털고 일어 났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성전미문의 앉은뱅이는 나면서부터 걷지를 못했습니다.

평생 성전문앞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고 구걸하면서 살았습니다.

자기 발로도 걸어오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데려다 주면 그 자리에서 하루종일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동네사람들이 다시 데리고 가야 집으로 갈수가 있었습니다.

평생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루는 베드로와 요한이 지나 갑니다. 늘 하던데로 손을 벌립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베드로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전 같으면 못본척 하던지, 아니면 동전을 던져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을 받고 능력을 받고 나니 똑 같은 사람을 보아도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음식을 주어야 하고, 옷이 없는 사람에겐 옷을 주어야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근원적인 일입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금과 은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일어나 걸으라… 하고 잡아 당겼습니다.

그러자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서 일어 납니다.

평생 걸어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의학적으로는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치료 되었다고 해도 평생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의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겠습니까?

그런데 평생 걸어본적이 없이 뼈와 근육이 굳어 있던 사람이

예수의 이름 한마디에 벌쩍 일어납니다.

그리고 뛰었습니다. 걸었습니다. 찬양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능력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믿는 우리 모두에게 주신 능력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믿는자에게 주신 능력인 것입니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북한에는 소련군들이 진주해 있었습니다.

그때 함경도에서 어느 가정에 불행한 일이 일어 났습니다.

마을의 한 처녀가 소련 군인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아이를 갖게 된 것입니다. 아이는 태어 났지만 혼혈아로 태어난 여자아이는 한국사회에서 제대로 자라날수가 없었습니다. 동네사람들은 집안망신이라고 외면을 했습니다.

갖다 버리라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죽여 버리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보다 못해 4살 짜리 어린여자아이를 내 보냅니다. 어린여자아이는 구걸을 하면서 거지생활을 하면서 남쪽으로 내려옵니다.

온갖 고통을 다 받으면서 구걸을 하면서 남쪽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10살이 될때까지 여자아이는 거지들 틈에 석여서 살아가게 됩니다.

백인 혼혈인 어린여자아이는 남자아이들의 성적노리게 였습니다. 그러다 고아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이 불행하고 불쌍한 여자아이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고아원을 찾아온 선교사님의 눈에 들어 미국으로 입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본 교단 미국목사님의 사모님이 되었습니다.

스테파니란 분인데 이분이 교단모임에 나와서 자신이 걸어온 그 고통의 길을 간증을 했습니다. 간증이 끝나고 거기에 모인 모든 목사님들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여인이 아니었습니까?

어떻게 이 여인이 미국까지 와서 목사님 사모님이 되시고 전세계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전할수 있으리라고 상상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불행한 환경속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운명이 바뀌고, 팔자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사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 61: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 61: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가난한 사람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상한자를 위로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슬픈자를 위로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슬픔을 기쁨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할수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프게 하셨다가도 싸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절망이 없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두려워 하겠습니까?

최후의 승리가 보장이 된 인생

이보다 축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광야같은 인생입니다.

풍랑속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언제라도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생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주님의 손 붙잡으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믿는자에게 능치못할일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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