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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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행13:20-23 

(행 13: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과거에 한국의 적십자사 총재를 지내신 서영훈장로님 의

증조 할머니가 시집을 올때 이런 에피스도가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신랑 신부가 얼굴도 보지 않고 중매쟁이가 맺어 주면 결혼당일에야 서로 얼굴을 보던 그런 일이 많았을 때 였습니다.

어느 중매쟁이가 말하기를 참 좋은 색시가 있는데 매우 좋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약간의 흠이 있는데 뭐가 흠이냐면 조금 멀다 라는 것입니다.

먼 것을 제외하고는 한군데도 흠잡을데가 없는 색시라는 것입니다. 서씨집안에서는 먼거야 뭐가 상관있나 해서 그 색시를 맞아 들이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이래 가지고 결혼하고 보니까 눈이 먼 장님이었습니다.

기가 막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매쟁이를 불러놓고 막 따졌습니다. ‘어떻게 장님을 데려와 가지고 좋다고 속이냐고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중매쟁이가 말하기를 내가 말했지 않느냐 다 좋은데 한가지 흠이 먼 것이 흠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눈이 먼 것이 흠이라고 했는데 자세히 듣지도 않고 이제 와서 야단이야 오히려 적반하장인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당장 파혼이다 그러겠지만 옛날에는 한번 결혼하면 왠만하면 헤어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눈이 먼 색시가 서씨 집안에 시집을 오게 된 것입니다.

이분이 서양훈장로님의 증조할머니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복덩어리 였습니다.

눈이 먼 것을 제외하고는 얼마나 지혜롭고 총명한지 그 자녀들이 다 잘되고 달성 서씨가 전국에서 유명한 가문이 되는 것입니다. 서양훈장로님은 국회의원도 하시고, 적십자사 총재가 되어서 세계적인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서씨집안에서는 장님을 며느리로 맞아 놓고 처음에는 집안에 망조가 들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 분의 지혜와 사랑이 달성 서씨 집안을 더 빛나게 만든 것입니다.

 

눈먼 장님으로 시집을 왔으니까 그 시집살이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어려운 환경을 믿음과 사랑으로 극복하고 한국 적십자사 총재를 지낸 서양훈장로님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집안을 망하게 하는 사람이 있고 집안을 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릴적에 부모님들에게 제일 많이 들은 말은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말이 었습니다.

지금 부모가 된 입장에서 우리들도 자녀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도 똑 같을 것입니다. 자녀에게 커서 부자가 되라고 말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출세한다고 해도 인간답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을 바라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훌륭한 신앙인, 위대한 신앙인이 되는 것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그렇게 처절한 고통속에 죽음의 희생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구원만을 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가 ‘참가’하는 데 의미만 두는 선수는 없습니다.

상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에 ‘참가’만 하는 것이 구원의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을 받을수 있는 ‘영광’의 자리에 까지 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로마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심의 최종 목적은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의로와 지는 것’은 시작이고 최종 목적지는 ‘영화롭게’되는 것입니다.

‘영화롭게’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나라에 가면 모두가 ‘영화롭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도 ‘영화로운 삶’ ‘영광스러운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신앙인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고난’이 없는 삶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신앙인’은 고난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출세, 성공’하지 못해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골목에 세워진 가로등처럼 어두운 밤거리를 말없이 비추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출세는 못하고 성공을 못한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자신의 가정에서는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자녀들에게는 인정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세상에서 아무리 출세하고 성공을 해도 가족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영광스러운 삶’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려면 우선은 ‘가정’에서 ‘영광’스러운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적어도’ 라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가정을 놓고 본다면 ‘다윗’은 실패한 사람입니다.

자식들이 서로 죽이고,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는 콩가루 집안이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한번의 실수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고 그를 전쟁 일선에 세워 죽게 만든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잘못에 대한 댓가를 치루게 한 것입니다.

한번의 뼈아픈 실수가 평생을 고통스럽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선택을 하고, 잘못을 하게 되면 그 열매는 살아가는 동안 내내 받게 됩니다.

우리는 미국이민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미국에서 사는 동안에는 미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도 한번의 뼈아픈 실수 였지만 그 실수는 너무나 큰 실수 였습니다. 그리고 그 실수의 댓가는 너무 컸습니다.

그 실수로 인해서 다윗의 가정은 콩가루 가정이 되어 버렸지만 처절하게 회개한 다윗을 하나님은 용서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광스러운 삶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왕상15:4-5]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의 아들을 세워 뒤를 잇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다윗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뼈아픈 고통을 받았지만 그 이후에는 다시 잘못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과 약속하신 것을 이루셧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19명이 모두 악한 왕이었지만 남 유다왕 20명 중에서는 좋은 왕들이 중간 중간에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 가셨고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은혜를 입게 하셨습니다.

 

왕은 다윗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42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초대왕 사울, 다윗, 솔로몬.. 그리고 북쪽 이스라엘에 19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여로보암, 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리, 오므리, 아합, 아하시야, 여호함, 예후, 여호아하스, 요아스, 여로보암2세, 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호세아

 

남쪽 유다왕국에 20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여호사밧, 여호람, 아하시야, 아달랴,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구약 왕들과 선지자들의 모든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열왕기서’입니다.

솔로몬시대가 끝나고 분열왕국이 시작되고 그리고 남쪽과 북쪽의 두 왕국이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갈 때 까지의 이야기가 기록된 것이 ‘열왕기하’입니다.

구약에 앞부분은 이해가 되는데 솔로몬왕 다음 부터는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줄 모르겠다 하시는 분들은 ‘열왕기하’를 집중적으로 반복해서 읽어 보시면 구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다시 다윗왕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영화롭게 하신 것은 그가 ‘왕’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새라는 사람의 막내 아들이었습니다.

이새라고 하는 사람은 베들레헴 시골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평범한 집안의 막내아들도 태어난 다윗이 일약 이스라엘의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훌륭한 사람들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거의 허물이 없이 자기 관리를 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을 들라면 요셉, 다니엘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다음에는 허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장점으로 인해서 허물이 가리워 지고 존경받는 사람들의 대열에 들어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다윗, 베드로, 바울과 같은 사람들도 허물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가장 위대한 인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큰 허물을 가지고 있었던 특이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그런 엄청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별이 되어서 3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자랑이요 희망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재기 불능의 허물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모두가 인정하는 위대한 사람이 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저는 내 마음에 합한자라”

사람이 사람의 마음에 들기도 어려운데 하나님의 마음에 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겠습니까?

주변에서 정말 마음에 쏙드는 사람을 찾아라고 하면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사람은 이것이 마음에 안들고, 저사람은 또 다른 것이 마음에 안들것입니다. 자신의 몸에서 나온 자식도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 조차도 자기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얼마나 많습니까?

 

거울을 보시면서 여러분의 자신의 얼굴에 감탄을 하면서 만족하시는 분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여성분들이 화장을 왜 합니까? 맨얼굴이 제일 좋다면 맨얼굴로 다니지 왜 귀찮게 화장을 하는데 그렇게 시간을 쓰고 돈을 쓰겠습니까? 마음에 안드니까 칼라를 칠하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자기 자신도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에 들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든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것이겠습니까?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도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 우리 보다 출신이 훨씬 더 못한 사람, 우리 보다 훨씬 더 배우지 못한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의 마음에 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마음에 드신 것은 다윗의 외모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이 능력이 많아서 그런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해서 기름을 부으실때의 모습을 보면 다윗은 집안에서도 막내로 아버지나 형들에게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막내니까 아버지나 형들이 시키는 일이나 해야하는 처지 였습니다.

아버지나 형들의 눈에는 그저 시키는 일이나 잘하는 착한 아이 정도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모,형제도 보지 못했던 다윗의 마음의 중심을 보고 계셨습니다.

 

다윗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성전’이 지어지기 전이었습니다.

요즘처럼 매주 예배를 드리던 때도 아니었습니다.

성경도 완성 되기 전이었습니다.

성전도 없고, 성경도 없고, 교회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가질수 있었겠습니까?

 

‘모세오경’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글로 기록이 되어서 개개인가 가지고 있지도 못했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모세오경을 겨우 알고 있을 정도 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다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 였습니다.

그런 시대였는데 ‘다윗’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은혜’라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그의 생각속에 하나님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면 온종일 그 사람만 생각하게 됩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생각하게 됩니다.

 

블레셋이 쳐들어 와서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징병을 당해서 전선으로 나갔습니다.

다윗은 막내라 나이가 어려서 전쟁에 나가지 않고 집에 있었습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전쟁에 나간 아들들의 소식이 궁굼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먹을 것을 형들에게 가져다 주고 전쟁의 소식도 알아 오라고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병사들과 대치하고 있는 이스라엘 군대로 찾아 갔습니다. 그때 마침 골리앗이 나와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하나님을 모욕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대는 그 앞에 기가 죽어서 벌벌 떨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하는 소리를 듣자 견딜수 없는 의분이 솟아 났습니다. 저 곰보다 미련한 놈이 감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하다니..

 

하나님이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며서 견딜수 없는 의분이 일어나는 것이 왜 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어려움을 당하면 그것을 보고 있을 부모가 없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있는데도 마음에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교회를 아주 우습게 보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놀림감이 되게 만든 현대 교회가 더 문제이기도 하지만 , 그렇다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우습게 보고 있는데도 아무 화가 나지 않는다고 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사랑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전쟁에서 승승장구하고 이스라엘의 최고의 왕이 되고 난 다음에도 교만해 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백향목으로 지은 좋은 집에 있고, 하나님의 성막은 천막으로 지어져 있는 것이 늘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탁을 합니다. 하나님의 전을 짓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허락해 주지 않았습니다. 너는 전쟁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거룩한 하나님의 집을 짓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너의 아들을 통해서 짓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일평생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해서 얻은 모든 전리품들을 성전건축을 위해서 준비해 놓았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가 준비해준 것들을 가지고 어렵지 않게 성전을 잘 지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합니다.

성전은 교회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구별된 곳은 교회밖에 없습니다.

 

저는 늘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가 제일 편하고 좋기도 해서 그렇지만 또 다른 이유는 우리 교우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교회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정이 좋은 이유는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없는 집은 썰렁합니다.

 

‘부모의 가장 중요한 역활’은 ‘기다리는 역활’입니다.

자녀들을 기다리는 사람이 부모입니다.

그곳이 ‘가정’입니다.

자녀들이 밖에 나가서 놀아도 기다리는 부모가 있는 집은 든든합니다.

언제든지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것의 중요함을 잘 모릅니다.

능력위주로 생각하고 일 위주로 생각합니다.

나를 기다리고 반겨주는 사람이 있는 곳이 ‘가정’ 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자녀들이 가정에 마음을 부티지 못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바깥에 더 마음을 두는 것은 마음을 붙일 곳이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약해지고 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가정입니다.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설교도 잘하고 능력도 있어야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역할은 ‘기다리는 역할’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가정, 현대의 교회는 ‘능력’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다림의 중요성’을 잊어 버리고 있습니다.

 

요즘 목사님들은 ‘성도들을 기다리는 곳이 교회’라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요즘 목사님들은 교회에 가면 스트레스 받기 때문에 교회에 안있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일터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목회자에게 일터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는 가정’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비록 세상일이 바빠서 교회에 나오지 못해도 교회에는 우리 목사님이 있는 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차이가 많은 것입니다.

부모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녀는 멀리 가지 못하는 것처럼 교회에 마음을 붙인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규모가 크고, 시스템이 잘 되어 있다고 해서 나의 신앙이 잘 자라는 것 아닙니다.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없는 곳은 자신의 가정이 아닌 것처럼,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없는 곳은 나의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에 마음을 붙이고 살았습니다.

다윗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디에 마음을 붙이고 살고 있습니까?

 

다윗에게는 사람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미워할수 없습니다.

‘미움과 분노’는 마귀의 마음입니다.

 

‘사랑’에는 ‘미움과 분노’가 있을수 없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게 만듭니다.

 

세상은 점점 좌,우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점점 극과 극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극과 극으로 가면 결국은 싸움과 전쟁이 날 수밖에 없고 세상은 파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온 세상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코로나’는 그 파멸을 경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해서 주시는 마지막 경고 일수 있습니다.

 

누가 이렇게 막가는 세상, 폭주하는 기관차를 멈추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만 할수 있습니다.

 

‘에덤스’라는 사람이 쓴 ‘질문의 기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분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두가지 관점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심판자로서 판단자로서 세상을 보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하나는 학습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항상 심판자의 자리에서 세상을 본다는 것입니다. 심판자로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사물을 볼때 잘했다, 못했다로 평가를 한다는 것입니다.

맞다 틀렸다로 항상 평가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심판자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사람은 자신도 심판의 그물에 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학습자의 자세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인생을 배움의 기회로 생각하고 사는 자세를 말합니다. 비판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모든 과정을 자신의 발전의 기회로 삼고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를 비판하기 보다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에덤스라고 하는 분은 이 책에서 말합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그리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면 학습자의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학습자의 마음보다 보다 더 위대한 것은 긍휼의 마음, 사랑의 마음인 것입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장인인 사울이 죽이려고 쫒아 다녔고, 다윗을 높이던 백성들로부터 버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친했던 친구들이 배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다윗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이런 위대한 사랑을 다윗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반대로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다윗을 평생 힘들게 만들었던 사울이나, 압살롬이 없었더라면 다윗의 위대한 사랑이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을 죽도록 힘들게 만들었던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다윗의 위대한 사랑은 보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의 아가페의 사랑이 보여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위대한 사랑은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빛을 발한다고 하는 진리를 볼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나의 인생을 힘들게 만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힘들게 나의 사랑을 광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옆에 분들에게 ‘광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 신앙인들이 추구해야 할것이 있다면 빛을 발하는 생활, 위대한 신앙인으로서의 삶일 것입니다.

세상에 없는 사랑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다윗과 같은 그런 사랑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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