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본받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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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본받아(3)

“그리스도를 본받아(3)” (요12:24-25) 202104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 라고 했습니다.
교회봉사, 전도, 선교 이전에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건강’을 잃어 버리면 모든 것이 소용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든든하지 못하면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한 순간에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든든하냐 든든하지 못하냐 하는 것은 쉽게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래위에 지은 집’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문제’가 생겼을 때 쉽게 흔들리고 넘어지느냐?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 있느냐? 하는 것으로 쉽게 알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리는 ‘영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영’ 우리는 ‘육’을 가지고 있고, ‘육’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으로 거듭나게 됨으로 끊어 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땅에 사는날 동안에는 ‘육’과 ‘영’을 동시에 가지고 살게 됩니다.
우리의 육신은 ‘죄’를 좋아하고, ‘죄’의 세상에 익숙해 있습니다. 반면에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합니다.
이 두가지가 우리 속에서 날마다 싸우게 됩니다.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끊임없이 솟아 오르는 ‘육신의 힘’을 이기기 위해서는 ‘영적인 힘’을 길러야 하는데 그것은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훈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방법은 ‘반복’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가실 때 ‘습관’을 좇아 기도하러 가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습관’은 ‘반복’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노력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세 번째 말씀입니다.
신앙이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워 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큰 바위 얼굴’ 이야기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능력과 은사’는 하나님이 주셔야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은 우리가 노력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모두 ‘인격과 성품’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진짜’와 ‘가짜’의 차이는 시간이 지나보면 알수가 있습니다.
진짜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더 해지는 것이고, 가짜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복음의 진수라고 할수 있는 말씀 역시 ‘죽어야 산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희생’이 없이는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첫째, 십자가의 희생이 가장 위대한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가 점점 어려워지고 불행해 지는 것은 ‘희생’에 대한 정신이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가장 중요한 정신이 ‘희생’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강이 유지되어가 가게 하신 원리를 보아도 알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희생’의 고리에 의해서 지금까지 생명이 유지되어 왔습니다.
모든 짐승의 어미도 새끼를 위해서 희생하게 만들어 졌습니다. 어미의 DNA 속에는 ‘희생’이라는 것이 심어져 있습니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짐승들은 새끼를 위해서 어떻게 희생해야 하는지 알게 되어 있습니다.

땅위의 짐승뿐만 아니라 하늘을 나는 새도, 바다의 물고기도 땅의 식물들까지 ‘희생의 고리’에 의해서 생명이 이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 창조하신 생명세계의 법칙입니다.

‘희생의 고리’가 끊어 지게 되면 더 이상 생명은 이어지지 않게 됩니다.

인간세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희생에 의해서 자녀들이 올바르게 자랄수가 있습니다.
희생하는 사람이 있어야 좋은 세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희생’의 정신이 약해지게 되면 세상은 점점 어려워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먼저 희생해야 하는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모든 희생의 법칙은 순서가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똑 같은 희생의 법칙을 따르셨습니다.
창조주 이시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땅에 오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오시고, 가장 험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고귀한 생명을 우리를 위해서 희생해 주셨습니다.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똑 같습니다.
위에 있는 사람이 먼저 희생을 해야 합니다.
부모가 희생해야 좋은 가정이 되고
교회도 목회자나 지도자들이 먼저 희생을 해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희생하기 위한 직분입니다.
세상도 윗사람이 희생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나라, 좋은 세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죄성은 이기적입니다. 희생을 싫어 합니다. 그것은 마귀의 본성입니다.

마귀는 세상을 파괴하는 것이 목적이고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세상을 파괴하는 것이 목적인 마귀는 ‘희생’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희생’을 하지 않으면 ‘생명의 고리’가 끊어지고 저절로 모든 것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인 예수님은 ‘희생’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스스로 먼저 ‘희생’을 하시므로 마귀가 끊으려고 하는 ‘희생의 고리’를 이어 놓으셨습니다.

세상이 점점 어려워 지는 것은 ‘희생’의 가치가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개인주의’라는 것은 희생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민족은 모두 위대한 정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정신만 위대하면 위대한 민족이 되고 정신이 무너지면 무너지고 맙니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세계의 문제는
경제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신의 문제’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을 해도 정신이 무너지면 세상은 무너지게 됩니다.
‘코로나’와 같은 재앙이 왜 생겼습니까?
‘정신’이 타락하고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아도, 연속극을 보아도, 소설을 읽어도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이야기는 희생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에는 마지막 클라이 막스에 희생의 이야기가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희생만큼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류역사이래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는 십자가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세상에 의를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위해서, 원수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죄인은 죽어야 하고, 원수는 갚아도 시원찮은데 원수를 위해서 어떻게 대신 죽어준단 말입니까?

십자가의 위대한 정신을 가질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왜 기도합니까? 왜 찬송 부르십니까?
십자가의 정신을 가지고 채워서 세상을 살리고, 세상을 구원하는 성도가 되기 위함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생활을 적당하게 하면서 좋은 교인이 될 수가 없고 위대한 성도가 될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희생정신으로 생활을 잘 할 때만이 나라와 국가의 발전에도 기여하게 되고, 우리 가정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고, 내 개인의 모든 범사의 삶에도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가장 위대한 정신인 십자가의 희생 정신을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목회를 하면 할수록 ‘성경말씀’이 놀랍다 하는 것을 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더 확실하게 믿어 집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가? 하는 것이 더 느껴 집니다.

그리고 ‘교회’가 얼마나 좋은 곳인가? 하는 것이 더 느껴 집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정말 얼마나 좋은 종교인가? 하는 것이 더 느껴 집니다.

세상은 자기 먼저 살겠다고 몸부림 치는 곳입니다. 남을 밟고 올라 서려고 하고, 남을 죽이고 나부터 살려고 하는 곳입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 ‘보이스피싱’의 피해자가 많다고 합니다. 매년 ‘보이스피싱’으로 패해를 입은 금액이 몇천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기꾼’도 많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도 일반 시민들은 피땀흘려 모은 돈이고, 꼭 필요한 돈인데 그것을 사기쳐서 남이야 죽든말든 훔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참 나쁜 사람들입니다. 지옥도 아까운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은 그런 곳입니다.
눈을 감으면 코를 베어가는 것이 아니라, 뻔히 눈을 뜨고 있는데도 코만 베어 가는 것이 아니라 홀딱 베껴 가는 세상입니다.

세상만 그런 곳이 아니라 교회내에도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목사들도
공동목회했던 사람도 뜯어가고, 부목사했던 사람도 뜯어 가고, 사찰집사했던 사람도 뜯어가고, 마지막에는 후임자라는 사람까지도 뜯어 갔습니다.

거기다가 저는 ‘권총강도’를 세 번 만났습니다. 두 번 지갑을 털리고 한번은 시계를 빼앗겼습니다.
저는 ‘뜯기는 은사’가 있나 봅니다.

그런데 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교우들은 저처럼 ‘뜯기는 은사’가 있으신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이나 안수집사님들도 보면 ‘뜯기는 은사’가 있습니다.

이렇게 뜯기고, 저렇게 뜯기고, 이렇게 털리고, 저렇게 털리는 험악한 세상을 살고 있는데 교회에 오면 맨날 하는 이야기가 ‘오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 대라…’ 겉옷을 빼앗고자 하면 속옷까지 주어라,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가주어라..‘먼저 죽어라’ ‘먼저 희생해라’

다른 종교에서도 ‘자비’를 가르치고 ‘선행’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죽으라고’까지는 하지 않습니다.

‘자비’나 ‘선행’은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정도가 아니라 ‘남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은 것’입니다.

세상은 ‘선행’까지는 할수 있지만 ‘죽는 것’은 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죽는 것’입니다.
남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참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예배를 드릴 때 마다 듣는 것이 ‘죽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살려고 몸부림 치는데, 교회에 오면 맨날 ‘죽어..죽어.. 죽어’ 하고 설교합니다.
그리고 ‘아멘, 아멘’ 합니다.

세상에 이런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얼마나 교회가 좋은 곳입니까?
세상을 살리고 남을 살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태양’이 있기에 이 땅에 생명체가 살고 있는 것처럼 ‘교회’가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아직 멸망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가 사라지고 나면 세상은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마지막 요한계시록이 예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와 성도가 들림을 받아서 하늘나라고 가게 되는 그날이 이 세상의 종말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생명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희생’에 의해서 세상에 빛이 되고 세상을 살리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하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듯이, 교회와 성도는 희생하기 위해서 이땅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희생이 없이는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희생이 없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위대한 것입니다.
‘생명’을 몸속에 잉태하는 경험은 ‘남자’는 할수 없는 경험입니다.
얼마나 신비한 경험입니까?
‘여성’들은 남자가 꿈에도 경험할수 없는 신비하고 생생한 경험을 할수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런면에서 ‘여성’이 더 남성 보다 더 성숙할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도 더 깊을수 없습니다.
남자는 도저히 알수 없는 신비한 생명의 경험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들은 새생명을 몸에 잉태하는 순간부터 ‘희생’의 경험을 해야 합니다.
우선 여성의 몸부터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얼굴도 붓고 몸매도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음식을 먹어도 배속의 아이를 먼저 생각하면서 먹어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도 조심해야 하고 행동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해산의 고통’을 격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키워야 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이요 ‘희생’입니다.
단순한 죽음이 아니요 ‘생명’을 구하기 위한 ‘죽음’입니다.
부모의 ‘희생’으로 ‘자녀’들이 잘 되는 것처럼
‘희생의 원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이고
‘사랑의 원리’입니다.

‘존경’은 ‘희생’에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한국에서 사역한 선교사들 가운데는 경상도 선교의 초석이 된 데이비스 선교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1857년 호주 멜버른에서 출생, 멜버른대학과 영국 에든버러대학에서 공부하였습니다.
그때 그에게 한국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누님과 함께 한국에 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들 남매는 다니던 교회의 후원을 받아 호주 장로교회의 선교사로 1889년 10월 한국에 파송됐다.
서울에 도착한 이들은 5개월 동안 열심히 한글을 배워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그후 다른 선교사들과 상의한 끝에 당시 미개척지인 부산을 선교지로 정했습니다.
자동차도 없던 시절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300리의 긴 여정으로 그에게 너무나 힘든 여행이었다. 부산에 거의 도착하였을 때 데이비스는 천연두와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복음한번 전해보지 못하고 1890년 4월15일에 죽고 말았습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사망은 호주교회가 한국 선교에 큰 관심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한국 선교를 확장하기로 결정하고 모금 활동을 벌여 선교사 한 가정과 3명의 독신 여선교사를 파송하여 부산에서 선교 사역을 하게 하였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 경상도 선교를 가능하게 만든 것입니다.

희생은 우리의 인생을 가장 위대하게, 가장 아름답게 만듭니다.
기본적인 희생이 있습니다. 가정에 희생하고, 교회에 희생하고, 사회에 희생하는 것은 누가나 마땅히 해야 하는 기본적인 희생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희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다른 재능을 주시고, 다른 희생을 주셨습니다.

어떤 분은 선교에 희생하고, 어떤 분은 전도에 희생하고,
어떤 분은 봉사하는 일에 희생을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일에 희생하고, 병자를 치료하는 일에 희생하고, 노인을 위한 희생, 장애자를 위한 희생, 그리고 감옥에 가 있는 제소자를 위한 희생 등등 여러 가지 희생이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진정한 희생이 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에게 희생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그 희생위에 축복을 하실 것입니다.
희생의 삶은 가장 큰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희생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됩니다.

여러분들이 부담을 느끼는 그 부분이 어쩌면 여러분들이 희생해야할 분야인지 모릅니다.

저는 예수 믿고 나서 사도행전이 그렇게 싫었습니다. 부담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희생을 요구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피하고 싶은 육신의 생각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부담을 느끼는 분야는 어디 입니까? 피하고 싶은 일은 어떤 것입니까? 어쩌면 그일이 여러분이 희생해야할 일일 것입니다.

희생은 우리의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위대한 희생은 위대한 인생을 만듭니다.
성경에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사람들은 먼저 위대한 희생을 한 사람들입니다.

(히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의 희생으로 인해서 애급에서 노예살이하던 200만의 유대인들이 애급에서 나와서 가나안땅으로 들어갈수가 있었습니다.

셋째, 적은 것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큰 것은 가장 적은 것에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지구상에 가장 큰 생명체는 흰수염고래입니다.
그 고래가 주 먹이로 삼는 것은 ‘크릴’이라고 하는 작은 새우와 비슷한 갑각류입니다.
고래뿐만 아니라 상어, 물범, 펭귄의 식량원입니다. 흰수염고래는 하루에 400만 마리나 되는 크릴을 먹는다고 합니다.
새우같이 생긴 가장 작은 갑각류에 속하지만 바다의 많은 물고기들의 먹이가 되어서 가장 큰 희수염고래의 생명을 살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두 힘과 재물을 가진 유명한 소수의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인생의 밑바닥에서 힘없이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약한 사람이 없이는 그들도 존재할수 없고 세상도 존재할수 없는 것입니다.

대형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형교회도 수많은 작은 교회들의 희생으로 대형교회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교회의 90%는 작은 교회이고 대부분의 성도들이 100명 이하의 작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요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이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은 것이 모여서 눈에 보이는 물체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희생이 온 인류를 구원하는 것처럼 한 사람의 희생이

나 하나 희생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하는 생각이 들때가 많을 것입니다.
저도 때로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나 혼자 용쓴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

(빌2:6-11)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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