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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야기(27) ‘크리스챤의 야성’

복음이야기(27) ‘크리스챤의 야성’ 눅10:1-9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몇 달전에 옐로스톤에서 들소새끼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
그 이유는 들소새끼가 물에 빠져 있는 것을 어느 관광객이 불쌍해서 건져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들소새끼는 죽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손을 탄 들소는 몸에서 사람냄새가 묻어 있기 때문에 들소무리에 끼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들소어미라고 하더라도 사람손이간 새끼는 배척해 버리고 결국 들소새끼는 홀로 무리에게 떨어져 방황하다가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원관리국에서는 절대 짐승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고 만지지 말라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만지는 사람에게는 벌금을 물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잠깐 만지기만 해도 동물들은 그 냄새를 안다고 하니까 짐승들의 후각이 놀랍게 발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써커스를 보면 무서운 호랑이와 사자가 사람에게 길들여 져서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고 쇼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짐승을 다루는 사람들을 보면 수시로 먹을 것을 하나씩 던져 주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훈련을 시키면서 조련사가 원하는 행동을 하게 만듭니다. 구경꾼들은 재미있어 하면서 박수를 치지만 짐승들의 입장에서는 불행하고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독수리와 호랑이는 모든 짐승을 지배할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에 갖혀 있으면 구경거리 밖에 되지 못합니다.

레돈도비치에 가면 펠리칸새들이 있습니다.
안내문을 보면 음식을 던져 주지 말라고 적혀 있습니다. 자신들이 물고기를 잡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사람들이 던져주는 음식을 먹으면 야성이 죽어 버리게 되고 그러면 결국 살아남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호랑이는 산속을 활보할 때 호랑이이고,
사자는 들판을 달릴 때 사자이고
독수리는 창공을 지배할 때 독수리입니다.
그것이 집승의 ‘야성’입니다.

‘야성’은 사람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은 동물의 본래의 거친 기질을 말합니다.
사냥을 하지 못하는 호랑이는 더 이상 호랑이가 아닙니다.
‘야성’을 잃어 버린 사자나 호랑이는 더 이상 짐승의 왕이 되지 못합니다.
이빨 빠지고 늙어서 힘을 잃어 버린 사자는 하이에나의 먹이감이 되고 맙니다.

●저는 자주 ‘being’ 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being’ 은 ‘존재’를 말합니다.
Who am I ?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Being’은 존재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목적이 있습니다.
‘마이크’는 소리를 크게 하기 위해서,, ‘의자’은 앉기 위해서,,
‘에어콘’은 시원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짐승의 ‘being’ 은 ‘야성(feral)’입니다.
동물원 동물원 안에서 던져주는 음식을 받아 먹고 사는 것이 그들의 본래의 모습은 아닙니다. 양육강식의 거친들판에서 처절한 생존경쟁속에 살아가는 것이 본래의 모습입니다.
짐승에게는 놀라운 후각이 있어서 멀리서도 냄새를 맡습니다. 그리고 시각이 발달이 되어서 아주 멀리 있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청각도 발달이 되어 있어서 아주 적은 소리도 들을수 있습니다. 이런 발달되어 있는 ‘야성’은 양육강식의 무자비한 자연세계에서 살아 남을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요 최선의 힘인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는 누구인가?를 먼저 발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깨달아야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올바른 답을 바르게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를 생각하지 않으면 바른 길을 갈수가 없습니다. 교회생활도 그렇습니다.
교회란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를 해야 바른 교회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챤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짜 우리의 모습 이겠습니까?
나의 신앙생활하는 모습이 진짜 성도의 모습일까?
우리의 교회가 진짜 교회의 모습일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매일 거울을 보듯이 우리의 모습이 비뚤어 지지 않기 위해서 항상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배울수 있는 ‘being’ 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온유하고 겸손하신 성품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야성’입니다.
예수님에게 ‘야성’이란 표현을 하는 것이 좀 불경스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야성’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은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어린양과 같은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고 거친 모습도 있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무리들을 쫓아 내시고, 무서운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귀신들을 좇아 내시고, 마지막에는 죽음의 권세도 이겨내시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 모습을 이해하기 쉽게 ‘예수님의 야성’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크리스챤의 야성’은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손을 들고 찬양하는 모습’, ‘부르짖고 기도하는 모습’..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모습’…
아니면 ‘큰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모습’…
현대 크리스챤들의 일상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상적인 모습들이 우리 크리스챤들의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모습이야 말로 현대교회가 다시 찾아야 할 ‘크리스챤의 야성’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새끼 호랑이는 어미 호랑이로부터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사냥하는 법을 배웁니다.
독수리는 새끼를 높은 공중에서 떨어뜨려서 날아가는 법을 배우게 합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70명의 사람들을 세우시고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고 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세상’은 ‘광야’입니다. ‘전쟁터’입니다.
‘양육강식’의 세상입니다.
‘크리스챤’은 거친 세상속에서 ‘빛’을 발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며서 영혼을 사냥하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끼리 해 보게 하시고, 오늘은 70인을 세워서 둘씩 짝을 지워 내 보내시면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우선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사실입니다.
지금 까지 우리가 살아 왔던 모든 삶의 방법을 바꿔야 할 만큼 중요한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신앙생활의 대부분은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해왔고 그렇게 배워 왔습니다.
저도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울타리 안이 너무 편하고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찾아도 즐겁게 해 주고 편안한 교회를 찾아 다닙니다. 자녀를 맡겨 놓으면 알아서 잘 교육시켜 주는 교회를 찾아 다닙니다. 그래서 어떤교육학자는 말하기를 ‘주일학교’가 교회를 망치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습니다.
자녀의 신앙교육은 부모가 가정에서 해야 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인데 가정에서는 신앙의 본을 보이지 않고 주일학교에 맡아서 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신앙교육이 이루어 지지 않으면 신앙의 뿌리를 내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때 까지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대부분 교회를 떠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요즘은 기독교 전체가 자성을 하면서 반성을 하고 있는 때입니다.
대책없이 무너져 가는 교회를 바라보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든 기독교 신문이나, 교회관련 서적이나.. 목사님들의 설교나,
세미나에서 똑 같은 내용의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의 도덕적인 타락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야성을 잃어 버린 것이 더 문제입니다.
사자는 들판을 지배해야 사자 이듯이
독수리는 창공을 지배해야 독수리 이듯이
교회는 세상을 정복할수 있어야 교회입니다.

우리들은 신앙생활을 ‘울타리’ 안에서 생활해 왔습니다.
그것이 익숙해 있고 편하게 생각을 해 왔습니다.
‘교회’라는 ‘울타리’안에서만 신앙생활을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살아 왔습니다.
울타리 안에서 자리 싸움을 하고, 큰울타리, 적은 울타리 비교를 하고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교회생활이라고 착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울타리’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교회안에 가두지 않았습니다.
온 세상이 우리들의 일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400년동안 애급에서 노예라는 울타리에 갖혀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광야에 풀어 놓았습니다.
처음에는 해방이 되었다고 좋아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을 합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이 당장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애급에 있을때는 자유를 잃었지만 던져주는 음식을 먹으며 먹고 사는데는 지장이 없었지만, 광야에 나오니 모든 것이 불편합니다.

그래서 불평과 원망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애급으로 돌아가자고 소동을 벌렸습니다.
그것이 ‘노예생활’익숙해 져서 ‘하나님 백성의 야성’을 잃어 버린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급해서 가나안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40년동안 거친 광야에서 살게 하시면서 잃어 버린 하나님 백성의 야성을 회복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현대교회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살아있는 야성’입니다.
세상이 던져주는 달콤한 맛에 길들여 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붙잡혀 있는 영혼을 구원하고, 세상을 변화시킨 영적군사로서, 그리고 영혼을 사냥할수 있는 살아 있는 야성입니다.

성경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은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자를 찾는다.. 고 했습니다.
‘전신갑주’로 무장하라… 고 했습니다.

‘교회의 조직’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조직이지
세상과 울타리를 치기 위한 조직이 아닙니다.
‘군대조직’은 전투를 잘하기 위한 조직이고,,
‘올림픽선수촌의 조직’도 메달을 따고 승리를 위한 조직입니다.
‘기업체의 조직’은 돈을 잘 벌기 위한 조직입니다.

교회에도 조직과 행정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마귀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조직입니다.
예배가 중요합니다. 무엇을 위한 예배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인 동시에 하늘의 힘을 얻어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가 하는 중요한 기능이 있습니다.
‘예배, 교육, 전도, 친교, 봉사’를 말합니다.
그런데 야성이 없는 예배, 야성이 없는 교육, 야성이 없는 전도, 야성이 없는 친교와 봉사는 힘이 없습니다.
‘전도’는 교회를 부흥시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전도’는 크리스챤이 가져야 하는 ‘야성’ 그 자체입니다.

사자나 독수리는 자연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듯이 우리 역시 세상속에서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싸울때가 제일 행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을 마을을 방문하시면서 전도를 하셨습니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좇아 내시고, 전도하고 복음을 전하시느라 피곤하셨습니다.

사도들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전하는 것에 전무 하리라…’
사도들이 말하는 말씀 전하는 것이란 오늘날 목사님들이 주일 설교에 매달려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온 동네를 다니면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설교만 잘하면 길거리로 나가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여 듭니다.
설교를 따라 모여드는 사람들은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기존 신자들입니다.
야성을 잃어 버린 성도들은 편안히 앉아서 설교를 즐기려고 하고, 야성을 잃어 버린 목회자들은 교회안에 머물면서 성도들이 찾아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길거리로 나가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여 들고 인기를 누리니까 목사님들도 야성을 잃어 버렸습니다.
성도님들도 목사님이 설교만 잘해 주시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현대 개신교회의 문제는 예배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설교는 예배의 한 부분이지 전체는 아닙니다. 그런데 성도님들은 설교를 들으면 예배를 다 드린것으로 생각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예배의 본질입니다.
설교는 그 예배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아야 그것이 훨씬 더 영양가 있는 말씀이 됩니다.

성도님들도 교회울타리 안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울타리 안이 편하고, 울타리 안이 안전하기만을 바랍니다,
고생스럽게 울타리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모두 야성을 잃어 버렸습니다.

사냥하는법을 잃어 버린 사자는 울타리안으로 던져주는 음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돌아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역마살’이 끼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 크리스챤의 야성이 그런 역마살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교회안에 묵여 있지 않고 세상에서 영혼을 구원하고 싶은 열망을 말합니다.

그것이 성령충만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도 동네로 길거리로 다니셨고, 제자들도 그렇게 훈련시켰고, 오늘 70인을 파송하면서도 그렇게 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군대생활할 때 경기도 포천에 있는 8사단에서 군대생활을 했습니다. 8사단은 오뚜기사단으로 알려진 교육사단이었습니다.
교육사단은 일년내내 훈련만 하는 곳입니다.

휴전선이 있는 부대는 경계근무를 서는 것이 주된 임무이지만 휴전선 바로 다음에 있는 부대는 교육사단으로 일년 내내 훈련을 합니다.
전쟁이 나면 휴전선에 있는 부대가 방어를 하는 동안 휴전선 다음에 있는 부대는 바로 준비를 해서 올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년내내 훈련을 합니다. 전반기에는 기본훈련을 하고 가을이 되면 군장을 꾸려서 지정된 고지로 올라가서 방어를 하는 훈련을 하게 됩니다.
훈련을 많이 하는 군대는 내무생활이 좀 편한 편입니다.
하루종일 훈련하고 들어오면 고참들도 피곤하기 때문에 졸병들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훈련을 많이 하지 않는 군대는 내무반 생활이 고달픕니다. 청소불량, 관물정리불량, 군기불량.. 온갖 트집을 다 잡아서 밤에 불러내고 때리고, 기합주고 그럽니다.

교회가 너무 많이 싸우고 갈라지고,, 그래서 교회라고 하면.. 싸우는 곳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왜 교회와서 싸웁니까? 크리스챤의 야성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살았다면 교회에 와서 싸우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영혼구원을 위해서 전도하다가 왔다면,,,
한 영혼 구원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안다고 하면,,
주일날 서로 만나는 것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우리의 전쟁터는 세상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는 사탄과 마귀와 귀신이지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아닙니다.

찬양대가 찬양을 잘하면 은혜가 됩니다.
반찬도 더 맛있게, 더 많이 하면 좋지 않으냐? 예 맞습니다. 틀린말 아닙니다.
청소도 깨끗하게 하고, 교회의 행정도 정확하고,
주보에 글씨도 틀리면 안되고,,, 예 맞습니다….
성도님들이 하시는 말 하나도 틀린말 없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목숨까지 걸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목숨 걸어야 할 곳은 ‘세상’입니다.
우리의 모든 지혜와 에너지를 다 쏟아 부어야 할곳은 세상입니다.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살펴야 할 것은 ‘잃어 버린 영혼’ 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그렇게 살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그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이제 교회라는 울타리를 벗어 날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길거리에서 확성기로 외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전도하고 싶으신 분은 하셔도 좋겠지만…
영혼구원에 깨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을 내서 사람을 찾아 가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보험 판매를 제일 잘하시는 어떤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매년 판매실적이 1위 였습니다.
이 분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보험을 판매 할수 있었던 것이 여러 가지 특별한 점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제가 참 감동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이분은 매년 보험 판매로 억대의 수입을 가집니다.
그런데도 매주 한번은 전단지를 들고 길거리에서 나누어 준다고 합니다.
전단지는 사실 효과가 없습니다.
수천장을 돌려도 전화가 한번 올까 말까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효과도 없는 광고방법인데 돈을 들여서 전단지를 만들고 직접 길거리에서 돌리는 것은 초심을 잊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보험 하나를 파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늘 몸으로 체험하고, 그리고 자신에게 보험을 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잊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 매주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돌린다고 합니다.

스데반, 빌립도 안수집사로 뽑혀서 구제를 하라고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몸이 근질 근질해서 그일만 하고 있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길거리로 나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다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복음을 전하고 싶은 ‘스데반의 야성’을 묶어 둘수가 없었습니다.

미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하기 위해서 자신의 시간빼고 듣기 싫어 하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고, 창피한 일이고, 부끄러운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하늘의 상이 큼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안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우리의 ‘야성’이 사는 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래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being입니다.

사자가가 동물원에 갖혀 있는 것이 부끄러운 모습이듯이, 우리가 교회안에 갖혀 있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만나서 안식하는 곳입니다.
봉사도 기쁨으로 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예수의 피로 거듭난 형제 자매들이 서로 위로 하고 격려하는 곳입니다.

솔개의 변신
여러분도 솔개의 이야기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솔개는 보면 70-80년을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40년 전도가 되면 부리가 낡고 부러지고, 발톱도 닭아서 없어지고, 날개 깃도 빠지고 약해 힘이 없어져 버립니다.
사냥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느냐 다시 살아나느냐
그때부터 솔개는 눈물겨운 거듭나기를 시작합니다.
자신의 부리를 바위에 쪼아서 떼어 버립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다시 새로운 부리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시난 부리로 발톱을 하나씩 쪼아서 빼어 버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날개 깃텃을 뽑아 버립니다.
그렇게 130일동안 눈물겨운 거듭나기를 통해서 새로운 40년을 더 살게 됩니다.

우리 교우들이 대부분 중년을 넘었습니다.
솔개로 치면 40년이 지났습니다. 그대로 힘없이 남은 인생을 사느냐, 아내면 탈태환곡을 하고 다시 전진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과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전화기를 집에 놔두고 나온 적이 있는데 집으로 전화를 하려고 하니 전화번호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전화번호를 일일이 눌러서 전화를 하니까 전화번호를 기억을 했었는데 요즘은 다 간편하게 이름만 눌르면 되니까 전화번호가 외워 지지 않습니다.
이제는 전화할 때 번호를 눌러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조금 불편하고 시간이 좀더 걸리더라도 전화번호를 눌러야 번호를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운동이 부족한 시대에 파킹도 멀리하고 편한 것 찾지 말고 불편하게 살고.. 우리의 정신과 육체와 그리고 영혼이 살기 위해서는 새로워 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동네를 다니시면서 전도 하셨고, 길거리에서 전도 하셨고, 일부러 찾아 가기도 하시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복음을 전하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저도 그렇게 할것이고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도 교회안의 일보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동네를 다니며 전도하신 예수님의 야성을 닮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울타리안에 있으면 편하지만 편한것이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편하게 살지 않으셨고, 제자들도 편한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이땅에 존재하는 것은 편한길을 버리고 거친 야성을 가신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좁은 길을 선택하고 ‘크리스챤의 야성’을 회복해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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