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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야기(25) 슬기로운 교회생활

복음이야기(25) 슬기로운 교회생활 고전12:20-27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우리에게는 새로운 기쁜 소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복음을 다시 생각해 보면서 복음을 전하고 복음안에서 생활하는 교회생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복음은 예수믿고 구원받는 것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복음안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까지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가정에서 살고 가정에서 죽습니다. 육신의 생명은 가정이 가장 중요합니다.
영적인 삶은 교회에서 태어나고, 교회에서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됩니다.
복음을 이해하고 영적인 삶을 사는데 있어서 교회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교회생활이 은혜스럽지 못할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어쩔수 없이 할때가 많은 것이 교회생활인 것이 현실입니다.

‘자식이 원수’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적과의 동침’이라는 말들을 쓰기도 합니다.
적인데 서로의 유익을 위해서 어쩔수 없이 동거하는 형태를 말합니다.
우리의 교회생활이 그런것일까? 그런 고민들을 하게 됩니다.
믿음의 형제, 자매인데 사랑 하지 못할때가 많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의 결론은 적과의 동침이 아니라 우리는 같은 몸의 지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많은 목회자들은 ‘가정생활과 교회생활’ 사이에 고민을 합니다.
가정생활과 교회생활에 균형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
목회자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복음적인 삶일까?
고민을 하게 됩니다.

제가 처음 은혜를 받고 신학을 시작할 때 많은 목사님들은 ‘여행과 휴가’는 사치로 여겼습니다.
목사님들에게 있어서 ‘가정’은 항상 뒷전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철야를 하고 집에는 밥먹을때만 다녀 옵니다.
교회와 사택이 붙어있어서 교회생활과 가정생활이 구분이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강대상 옆에 자리를 펴고 기도하고 잠자고 그렇게 해서 능력받고 교회가 부흥되기를 소원했습니다.
사모님들 역시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좀 심한 목사님은 부부가 한 사람은 밤12시까지 기도하고 다른 사람은 일찍 자고 12시에 교회 나와서 교대로 기도했습니다.

과거에 세미나 갔다가 어떤 사모님을 만났습니다.
혼자 미국에 와서 사는데 한국에 계신 목사님이 목회에 방해가 된다고 혼자 미국가서 살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80년대의 일입니다.

80년대 까지만 해도 저녁예배 드리는 미국교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목사님들 처럼 교회에서 자면서 기도하는 그런 수준은 아니고 훨씬 더 자유로왔습니다.
그렇다고 문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신학교의 학생의 대부분이 백인들이었는데 여성들은 모두 긴 치마를 입고 다녔습니다.
남자 신학생중에는 청바지를 입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청바지 입는 것은 타락하는 것이라고 생각 했었습니다.
불과 30년 만에 세상은 참 많이 변했습니다.

미국목사님들과 한국 목사님들의 생활을 보면서 어떤 모습이 성경적인 모습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일까?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헌신을 해야 하지만 어떻게 헌신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일까?
가정생활, 사회생활, 취미생활은 다 뒤로 하고 오직 교회와 사역에만 헌신하는 것만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일까?
마리아처럼 옥합을 깨뜨려야 기뻐하시고, 옥합을 깨뜨리지 않으면 섭섭해 하실까?
바나바처럼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서 교회에 바쳐야 하는 것일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밭을 팔아서 반만 바쳤습니다.
그리고 다 바쳤다고 거짓말 했다가 한날에 죽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모두 바치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잘못하는 것일까?
여러분들은 그런 고민을 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목회자들마다 받은 은혜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분들의 생각이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창주물을 보면서 함께 기뻐하시기를 원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정을 만드시고 가정에서 부부가 서로 사랑하면서 화목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하나님은 보시기를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 되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복을 받고 감사하면서 복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만 직분에 따라서 헌신의 분량이 다르게 됩니다.
구약시대를 보면 제사장, 대제사장, 나실인, 레위인, 12지파..가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신앙생활과 헌신의 정도가 다릅니다.

레위지파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의 성전을 돌보는 일을 하기 위해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땅과 밭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지파 사람들이 내는 십일조를 가지고 생활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제사장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성전을 돌보고 제사를 지내는 책임자들입니다.
하나님앞에 좀더 많은 헌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일년에 한번 7월10일 대 속죄일 지성소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달동안 일체 모든 일에서 절제를 해야 합니다. 시체를 만져도 안되고, 집안식구중에 장례가 나도 참석할수 없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실인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들입니다.
나실인으로 드려진 구별된 날 동안에는 일체 세상일에서 멀리해야 했습니다.
직책에 따라서, 서원에 따라서, 하는 일에 따라서 하나님앞에 헌신하는 삶이 달랐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던 날에 지성소의 입구를 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 지면서 만인제사장의 시대, 복음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제는 일반지파, 레위지파, 제사장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만인 제사장입니다.
우리 모두가 제사장처럼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수 있습니다. 일반지파, 레위지파가 구분이 없이 모두가 하나님앞에 직접예배를 드릴수가 있습니다.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이제는 모든 삶이 하나님앞에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매여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유함으로 섬김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도 자유함으로 헌신합니다.
마리아처럼 옥합을 깨뜨릴수 있는 마음이 생기면 그렇게 드리면 그 마음을 받으시고, 또 그만한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자신의 믿음의 분량대로 드리면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십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모든 성도는 순종을 해야 하지만 그 외의 것은 자신의 믿음의 분량대로 자유함으로 드리면 됩니다.

그리고 영적인 성숙에 따라서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 있고, 성숙한 신앙이 있습니다.
목사님들도 은혜에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이 다릅니다.
기도에 은혜를 받으신 분들은 더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내게 되고, 전도에 특별한 은혜를 받으신 분들은 전도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 은혜를 받으신 분들은 섬기는 일에 더 집중을 하게 됩니다.
말씀과 기도, 전도와 봉사는 모두가 해야 하는 일이지만 자신에게 은혜가 더 되는 곳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를 이해하면서 도우며 함께 하는 것입니다
가정도 교회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몸입니다.
자신의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남을 도울수도 없고 오히려 주위 사람에게 부담을 주게 됩니다.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은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이다는 말처럼 건강을 잃으면 하고 싶은 일도 못하고, 해야하는 일도 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건강하게 관리를 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건강에 관해서는 저는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제 몸을 잘 관리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가정입니다.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처럼 가정이 평화로와야 만사가 잘 될 수가 있습니다.

가정의 목적은 서로 사랑하며 안식하고 보호하고 행복을 위해서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고 인류를 보존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인격과 성품은 가정에서 만들어 집니다.
어머니의 태에 있을 때부터 만들어 지기 시작합니다.
평화로운 가정에서 자라면 인격과 성품도 평화로와 지고 시끄럽고 복잡한 가정에서 자라면 성품도 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어릴적에 심한 상처를 받으면 세상과 사람을 향해서 적개심을 가지게 됩니다.
어릴적에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으면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 두려움은 마음속에 늘 잠재해 있으면서 대인관계를 힘들게 만듭니다.
상대방이 떠날것이 두려워 처음부터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상대방이 떠나면 받을 상처가 두려워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셋째는 교회입니다.
교회생활은 가장 중요합니다.
가정은 이땅에서 육신의 생활을 위한 것이지만 교회는 이땅에서의 생활뿐만 아니라 죽임이후의 내세에서의 삶을 준비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땅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고,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상처 난것을 치료하고, 온전한 인격체로 성숙해 가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살수 있는 길을 만들어 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교회생활을 잘못하면 문제해결이 아니라 더 큰 문제를 가지게 되고, 상처를 치료받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병원은 치료받기위해서 가는데 오히려 병원에서 더 큰 병을 얻을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나는 잘하고 싶은 교회자체가 문제가 생기거나 목회자가 문제를 일으켜서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복음을 이해하고 깨닫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신학교에 가면 제일 중요한 과목이 조직신학입니다.
조직신학은 우리의 믿음의 가장 중요한 뼈대가 되는 부분을 배우는 것입니다.
신 론… 성부, 성자, 성령님은 누구신가?
구원론… 구원은 무엇인가?
인간론… 인간은 무엇인가?
교회론… 교회는 무엇인가? 를 배우게 됩니다.

교회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 교회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교회는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섬으로 여행하는 크루즈선박이 아닙니다.
크루즈배를 타면 최고의 서비스를 받고, 최고의 음식을 먹으며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들을 돌아보면서 쉴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그럴것이라고 생각하고 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크루즈여행을 떠나는 것 처럼 안일한 마음을 가지면 안됩니다.
크루즈여행은 가만히 있으면 모든 것이 제공되는 시스템입니다.
그리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크루즈의 마음입니다.

이런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면 항상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국가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고, 가정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고, 교회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고, 친구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 그런 기대하는 마음은 항상 실망으로 끝나게 됩니다.

모든 관계가 그렇습니다. 기대치가 높을수록 실망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기대하는 대신에 내가 교회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할수 있을까?를 늘 생각하는 것이 복음적인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도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으면서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는데 익숙 합니다.
자신도 많은 문제가 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문제를 쉽게 지적합니다.
자기가 해야할 일도 안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 합니다.

어떤 가정이 좋은 가정입니까?
좋은 집에서 살아야 좋은 가정입니까?
아파트에 렌트해 살면 좋은 가정이 아닙니까?
아이를 많이 나으면 복받은 가정이고 아이가 없으면 복을 받지 못한 가정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교회역시도 그렇습니다.
좋은 교회당을 가져야만 좋은 교회이고 렌트해 있으면 부족한 것 아닙니다.
사람이 많으면 좋은 교회고, 사람이 적으면 문제있는것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은 가끔 이야기 합니다.
우리 교회가 처음 개척하고 베벌리에서 렌트해 있을때가
제일 좋았다고 하고 그때를 그리워 합니다.
부엌은 지금 부엌의 1/5만 했습니다.
본당도 지금 본당의 반만하고 천정도 손을 닿으면 닿을 정도로 낮았습니다. 찬양대실도 교실도 따로 없어서 전부가 같이 나눠 썼습니다. 마치 단칸방에 열명이 넘는 식구가 복작거리는 것처럼 그랬습니다.
찬양팀도 지금처럼 프로들도 아니고 통기타 하나들고 피아노 반주와 함께 찬양을 했습니다.

가정도 그렇지요. 신혼때는 전세방에, 단칸방에 살아도 그때가 좋았습니다. 나중에 재산이 늘고 원하던 집을 가지고 해도 별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환경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느 교회가 큰 교회를 샀다고 신문에 전면광고가 났었습니다.
아주 크고 좋은 미국교회를 구입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교회목사님이 한국에 대형교회로 청빙 받은 기사가 났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더 큰 곳으로 가는것 누가 말릴수 있겠습니까 마는 갈수 있음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더 아름답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들이 그러면 성도님들이 더 좋아 보이는곳 찾아 옮겨도 할 말이 없어 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가 무엇입니까?
(고전 12:25-27)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모든 지체가 소중하고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역할은 다릅니다. 어떤 지체는 심장처럼 중요한 지체가 있고, 두뇌처럼 지혜로와야 하는 지체도 있고, 손과 발이 되는 지체도 있고, 눈처럼 봐 주는 지체도 있고, 입처럼 먹어주는 지체도 있습니다.
손과 발이 되는 지체는 억울하고, 입처럼 말하고 먹기만 하는 지체는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그리도 손과 발이 일하지 않으면 입도 먹을 음식도 없고 말할 힘도 없어 집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세상 조직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속에 살면서 세상 조직에 익숙해 있습니다.
세상일에 익숙해 있습니다.
교회는 잘해도 내 몸이요, 못해도 내 몸입니다.
마음에 들어도 내 몸이요, 들지 않아도 내 몸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죄인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좋은 점도 있지만 우리에게는 치명적인 결점들도 있습니다.
모두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직도 완전히 아물지 않았습니다. 건드리면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 보듬고 가려면 서로 조심을 하고 아끼고 배려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같은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모든 교회의 꿈이고 소원입니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은 교우들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인생이 쉽지 않듯이 교회생활역시 쉽지 않습니다.
가정생활이 쉽습니까? 가정생활에 갈등이 없습니까? 자녀를 키우는 것이 쉽습니까? 사랑하면서도 쉽지 않는 것이 가정생활입니다. 그런데 교회생활은 가정생활보다 훨씬더 어려운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에 깊이 들어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상처를 많이 받고 또 그런 모습들을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멀찌 감치 있는 것이 답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가정생활, 교회생활을 가장 잘 할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분쟁이 없으려면..
‘룰을 지키는 것입니다.’‘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이 힘들다. 그리고 교회생활도 힘들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을실 때 그렇게 힘들게 짓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행복을 누리면서 살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인간 스스로가 고통을 자처한 것입니다.
‘룰’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살면 되는데 그 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내 마음대로 살면 더 행복하고, 더 성공적인 것이 아닌데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순종’은 성경이 가장 강조하는 인간의 덕목입니다.
순종은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딤후 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선신국은 룰이 지켜지고, 법이 지켜지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좋은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룰을 지키면 서로가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투표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투표에 지면 깨끗하게 승복을 하고 따라야 하는데 우리는 그러지 않습니다.
회의할때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더라도 일단 회의에서 결정이 되면 따라야 하는데 우리는 그러지 않습니다.
회의가 끝난 다음에도 계속 불평하고 반대하고 상대방을 욕하고 그럽니다.
불편한 감정을 계속 가지고 있습니다.
‘한번 반대는 영원히 반대’
세상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에서도 그러면 안되는데 교회 공동체에서는 더 잘해야 됩니다.

저를 아껴주시는 분들을 보면 어떤 분은 아들처럼 생각을 합니다. 내 아들이 목회한다 하는 마음으로 저를 섬겨 주십니다.
어떤 분은 사랑하는 후배가 목회를 한다는 마음으로 섬겨 주십니다.
어떤 분은 내 가족이 목회한다는 마음으로 새겨 주십니다.
그래서 아끼는 마음도, 이해하는 마음도 많아 지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족 보다 가까운 것은 없습니다.

교회생활을 잘할수 있는 가장 좋은 마음은 가족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좋은 마음은 같은 몸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요 우리는 그의 몸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입니다.
일주일에 이 시간을 위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월드컵축구 선수들은 90분 경기를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합니다.
모든 에너지를 90분에 다 쏟아 냅니다.
90분 안에 최대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 일년 내내 훈련을 합니다,

우리는 주일 이 시간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간을 가장 효과적으로 써야 합니다.
모든 정성과 에너지를 집중해야 최대의 결과를 얻을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우리는 그의 지체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지체요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지체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과 방법을 여기에다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실패하지 않는 삶, 후회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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