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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야기(26) 예수님을 따르는 길

복음이야기(26) 예수님을 따르는 길 마16:22-24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사람이 발전하고 성숙해 간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배운다고 해서 금새 내것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한번듣고 배운 것이 내것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인생도 훨씬 쉽고 고생을 안할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오랜 시간의 사귐이 필요하고, 지식을 내것으로 만드는데도 시간이 필요하고
운동을 해서 체력을 단련하는 것도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 역시 그렇습니다.
몇 번 들어서 내 것으로 만들어 지는 것 아닙니다.
성경공부도, 제자훈련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뼈를 깍는 훈련과 노력으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장하는 것은 ‘교훈과 훈계’ 때문입니다.
그런데 계속 들으면 ‘잔소리’ 처럼 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반복해서 듣다 보면 지겨워도 그것이 자신의 삶을 은연중에 성숙하게 만들어 주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반복해서 듣고 잔소리처럼 들리는 ‘교훈과 훈계’가 학문적이고 과학적이라고 합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연구를 했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이 바뀌려면 적어도 천번은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적이고 잘못된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신 6:6-8)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눈에 보이는 곳 마다 붙여서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그렇게 해서 ‘마음에 새기라..’ 했습니다.

요즘 스마트폰 앱 가운데는 전화기를 열때마다 성경 한구절이 떠오르는 것들도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전화기를 들고 살지 않습니까? 전화기를 열면 자동으로 성경이 떠 오르니까 참 좋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공부했다고 내 것이 되는 것 아닙니다.
같은 설교를 수십번 들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수백번 읽고 암송하고 있어도 그것이 내것이 되는 것 아닙니다. 몇 대째 예수를 믿고 평생 교회를 다니면서도 세상 사람보다 못한 인격과 성품을 가진 사람도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열망가운데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하나 하나 더 깊이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골프를 치시는 분들은 수천번, 수만번 스윙을 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갑니다.

한국에 있는 저의 친구는 골프 스윙연습을 얼마나 많이 했던지 갈비뼈에 금이 갔습니다.

성경은 복음입니다. 기쁜소식 입니다.
복음은 지옥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땅으로 끌어 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을 중력이라고 하지요.. 만유인력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것은 만유인력과 지구가 돌아가는 원심력을 합한 그 중력 때문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모두 우주속으로 날라가 버릴 것입니다.

중력의 힘은 엄청나기 때문에 우주선이 지구를 떠날때는 중력을 능가하는 엄청난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주선에 싫은 연료의 대부분은 중력을 탈출하는데 쓰여지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 능력으로는 지구의 중력을 벋어 날수 없습니다.
죄의 중력이 그렇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떤 사람도 죄의 힘에서 벗어 날수가 없습니다.
죄의 중력에서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입니다.
그것이 기쁜소식 ‘복음’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이 얻을수 있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평생 도를 닦으면서 고민을 했지만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성철 스님도 어머니까지 만나지 않으면서 평생 산속에서 도를 닦았지만 죄의 중력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죄의 중력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보혈의 힘으로 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이 믿음을 가질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그것이 믿어지는 순간이 바로 죄의 중력을 끊어 버리는 순간입니다.

2천년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 우리의 영혼속에 흘러 들어오게 됩니다.
막았던 저수지의 수문을 열어 놓듯이 성령께서 그 수문의 문을 확.. 열어 버리시고 하늘의 비밀이, 십자가의 보혈의 비밀이 깨달아 집니다.

영적인 눈이 떠지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가 보여 집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보여지고 느껴 집니다.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다시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중생의 순간입니다.

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 10달을 있다가 태어날때는 자신의 힘은 0.1%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세상에 나오려고 힘쓰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어머니의 힘으로만 세상에 태어나오는 것입니다.

일단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하고 성숙하고 온전한 성인이 되어 가는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백일을 넘기지 못하고, 일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리고 자라면서 넘어지고 다치고 상처받고, 친구들과 싸우고, 그러면서 성장을 해 나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 역시 그렇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순간적인 사건이지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평생의 일입니다…
물론 이것 역시 우리의 혼자의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순종과 노력이 함께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베드로도 3년동안 예수님을 따르다가 십자가 앞에서 도망가 버립니다.
그러다 다시 돌아 옵니다.
우리들 역시 그렇습니다. 때로는 도망가 버리기도 하고, 다시 회개하고 돌아 옵니다.
나를 얼마나 부인하는가? 얼마나 예수님을 따르는가? 하는 것은 평생 고민하고 싸워야 하는 문제입니다.

복음은 정말 세상에서 가장 기쁜소식입니다.
그런데 그 기쁜소식이 온전히 내것이 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되고 장로님이 되면 태권도 블렉벨트 정도 됩니다. 그 때 부터는 남을 가르칠수 있는 정도의 실력이 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그 이상 발전하지 못합니다.
블랙벨트를 따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손발이 근질근질하고 한번 싸워 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블랙벨트 정도가지고 깡패들과 싸웠다가는 죽도록 얻어 맞습니다.
블렐벨트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2단, 3단. 8단, 9단, 10단 마스터가 되어야 합니다.

블랙벨트가 되면 그때 부터는 스스로 수련을 해야 합니다. ‘기본이론’은 다 알고 있습니다.
교회생활 10년만 하면 다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 수련과 훈련을 통해서 신앙의 고수, 신앙의 유단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탄식한 것처럼 ‘언제 까지 우유만 먹겠느냐?’ 장성한 사람이 되라..

가만히 앉아서 복이 굴러 들어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기복신앙’입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기복신앙을 배척하고 실천 신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축복은 철저한 순종과 실천에 따르는 축복을 말씀합니다.
신명기에 나오는 축복, 들어가 나가도 복을 주시는 in and out의 가슴뛰는 축복은 철저한 조건부 축복입니다.
계약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갈 때 주신다는 축복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신명기의 축복을 뛰어넘고 초월하는 축복입니다.
이제는 그런 세상의 복을 주셔도 감사하고, 안주셔도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복을 받고, 구원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더 많은 옥합을 구하지 않고 평생 모은 옥합을 깨뜨렸듯이 복음의 진수를 깨달은 사람은 기쁨으로 그런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좀더 편하게 교회생활하고, 부담을 주지 않는 설교, 듣고 즐길수 있는 설교를 원하신다면 잘못생각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편안한 생활을 위해서 신앙생활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아버지는 이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이 세상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소금과 빛입니다. 이 세상을 밝히고 부패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바른 신앙생활, 바른교회,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해야하는 책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고민하고, 이것을 위해서 마음을 모으고,
이것을 위해서 지혜를 모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험한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듯이, 죄인을 위해서 온몸에 채찍을 맞으셨듯이, 마지막 피한방울, 물한방울 다 쏟으셨듯이… 우리 역시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3절)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나님의 일이 있고 사람의 일이 있습니다.
사람의 일은 이땅의 일입니다.
개인적인 욕망입니다.
우리가 하는 생각도 땅의 생각이 있고, 하늘의 생각이 있습니다.
사람의 일이 있고, 하늘의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모든 ‘땅의 일’이 나쁘다.
‘땅의 일’을 해서는 절대 안된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땅에 사는 날 동안에는 이땅의 일을 하지 않을수 없고, 이땅의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선 순위를 정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하신 말씀처럼..
하늘의 일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 때문에 하늘의 일을 소흘히 해서는 안된다..
그런 말입니다.
사람의 일과 하늘의 일이 겹칠때는 하늘의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생활을 하면서 인간적 신앙생활을 합니다. 사람 때문에 교회에 다니고, 사람을 따라 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람 때문에 시험이 들고, 일하다가 시험이 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사울은 사람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 눈치보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늘의 일과 땅의 일이 겹칠 때 어떤 것을 선택하십니까?

신앙이 성장할수록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되어야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24절)에 이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이 말씀입니다.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 자신을 버리라, 내려 놓으라’는 말입니다.
‘yourself’ 는 우리의 인격입니다.
우리의 자아입니다.
우리의 자아는 대접받고 싶어합니다.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사랑받고 싶어합니다.
다른 것은 다 참아도 인격을 건드리면 누구도 참을수 없습니다. 이것은 부모도, 배우자도, 친구도 건드리면 안되는 부분입니다.
우리의 자아, 인격은 우리의 존재의 이유입니다.

이런 소중한 우리의 자아와 인격을 예수님께서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자신을 찾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아는 아담의 원죄로 인해서 망가져 있기 때문입니다.

망가진 자아를 버려야 하나님이 주시는 자신의 모습을 찾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우리의 자아는 죄의 포로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의 자아는 자유를 잃었었습니다.
우리의 자아는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품고 절대 놓치 않으려고 하는 우리의 자아는 온전한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싶어하는 세상의 것들은 진짜가 아닙니다. 진짜는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싶어 하는 지위, 명예, 권세, 쾌락, 멋지고 아름다운 것.. 다 가짜입니다.
허상들입니다. 사막의 신기루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분노와 슬픔과 고통의 많은 것들이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입니다.
우리를 시험들게 하는 많은 것들이 버리지 못하고, 내려놓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들입니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고 화나게 하는 많은 일들이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찢기고, 모욕을 당하고, 조롱을 받고, 배신을 당해도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저들은 몰라서 저러고 있습니다….

스데반집사도 자기를 돌로 때려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똑 같은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저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고 하는 짓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그런 기도를 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짜를 버리지 않으면 진짜를 얻을수 없습니다.
진짜를 발견한 사람은 가짜를 버리는 것을 주저 하지 않습니다.
삭게오가 생명보다 귀하게 생각하던 재물을 아낌없이 던져 버릴수 있었던 것은 진짜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부모보다 형제보다 배우자 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자기 자신입니다.

그런데 내가 붙잡고 있는 나 자신은 허상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듣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것은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붙잡고 있는 것을 내려 놓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가끔 은혜를 받을때가 있습니다.
부흥강사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을때가 있습니다. 인터넷이나 라디오 설교를 듣다가 은혜를 받을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내가 모르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전에도 수도 없이 들어 왔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깨달아지지 않다가 어느 순간 깨달음이 올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은혜가 되는 순간입니다.

버리고 싶어도 버리지 못하던 것이 어느 순간 버려지는 때가 옵니다.
깨어지지 않던 것이 수도 없이 두드리다 보면 어느 순간 깨어 질때가 옵니다.

그런 순간이 반복이 되어 가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배가 부르면 어떤 음식도 맛이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으면 영적으로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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