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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사람(8) 온유

성령의 사람(8) 온유 갈5:16-2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사람은 태어나면서 하나님으로 부터 두 가지의 선물을 받고 태어 납니다.
자신의 ‘외모와 성품’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외모’는 바깥으로 보이는 것이요, ‘성품’은 내면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모와 성품’ 자체는 어느것이 좋다 나쁘다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외모’가 재산이 되고 능력이 될수도 있지만 꼭 그런 것 만은 아닙니다.

과거에 저희 교회에 다녔던 젊은 가정 가운데서 하버드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홍콩의 어느 회사에 스카웃이 되어서 갔습니다.
우리 교회에 온 다음에 이 가정에 첫딸이 태어났는데 고민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남자는 하버대에서 MBA를 땄으니 머리가 좋은 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얼굴은 아주 우락부락 ‘거칠게’ 생겼습니다.
반면에 Wife은 아주 이쁜 미인이었습니다.
첫딸을 놓고 나서 아빠가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얼굴은 엄마를 닮고 머리는 나를 닮으면 좋겠는데 그 반대가 되면 안되는데… 하고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아빠의 소원대로 얼굴은 엄마 닮고, 머리는 아빠 닮아서 요즘 말하는 ‘엄친딸’이 되면 좋겠지만 ‘엄친딸’이라고 해서 ‘행복’해 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있듯이 ‘얼굴’이 예쁘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고 ‘예쁜 것’ 때문에 불행해 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외모’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아 질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나 일반 ‘사회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성품입니다.
오늘 성령의 8번째 열매는 ‘온유’입니다.
성령열매는 ‘인격과 성품’을 말씀하고 있고 성경에서도 ‘인격과 성품’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인격과 성품’이 구원받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땅에 살면서 행복하게 잘사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인격과 성품’인 것입니다.

●‘온유’는 그중에서도 어쩌면 가장 중요한성품이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온유’는 말 그대도 ‘온화하고, 부드럽고, 포용력이 크고, 따뜻한 성품’입니다.

‘신앙의 성숙도’역시 ‘성품’을 통해서 나타 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처럼 성숙해 지면 ‘겸손해 지고, 온유해 지게’ 됩니다.
●‘온유’는 타고나는 성품이 아니라 ‘성령’안에서 만들어 지는 성품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얼굴’이 모두 다른 것처럼 기본적인 ‘성품’도 조금 씩 다릅니다
우선 타고날 때 ‘피형’이 주는 성품이 있습니다.
A형, B형, O형, Ab형으로 다릅니다.
A형은 Ace, B형은 Best, O형은 Outstanding,
Ab형은 Absolutely Best.
모두 좋게 설명해본 말입니다.

그리고 ‘기질’이 다릅니다.
논리적인 사람, 감성적인 사람, 급한 사람, 느린 사람.. 외형적인 사람, 내성적인 사람..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사람이 있고, 감성적이고 예술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다혈질’ ‘우울질’ ‘담즙질’ ‘점액질’로 나누기도 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성품과 기질은 어느 것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다를 뿐입니다.
모든 기질이 장,단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기질을 한가지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기질들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기질이 더 강하냐 하는 그런 차이입니다.

저는 ‘점액질’이 제일 많고 그리고 ‘우울질’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피형은 B형입니다. 그리고 MBTI 기질테스트를 하면 논리적인 부분은 0 이고 감성적인 부분은 10입니다.
저는 ‘계산하고, 따지고’ 하는 것은 딱 질색이고 ‘느낌’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매달 은행에서 날라오는 스테이트먼트나, 신용카드 스테이트먼트도 거의 보지 않습니다.
지갑에 돈이 얼마 있는지 계산해 보지 않습니다.
집에 월세가 얼마인지, 자동차 페이먼트가 얼마인지,
전기 값이 얼마인지 모릅니다.
아내가 모두 관리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집은 저희 집과 반대인 집도 많습니다.
남자가 관리하고 여자는 저처럼 계산하지 않고 막 써대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어떤 것이 더 좋으냐? 말할수 없습니다.
서로 맞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얼굴이 다른 만큼 ‘생각과 성품’도 다릅니다.
모두 다르지만 같은 목표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는 목표는 똑 같습니다.
이것은 해도되고 안해도 되는 ‘선택과목’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하는 ‘필수과목’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시대와 문화도 다르고 나라와 민족도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야 하는 것은 똑 같습니다.

●‘온유와 겸손’ 은 만들어지는 성품입니다.
‘신앙생활’을 통해서 만들어 지는 성품입니다.

●‘온유’는 성령의 열매이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팔복’의 말씀을 하시면서 세 번째로 언급하신 말씀입니다.
첫째,심령이 가난한 사람, 둘째,애통하는 사람, 셋째, 온유한 사람,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다섯째, 긍휼히 여기는 사람, 여섯째, 마음이 청결한 사람, 일곱째, 화평케 하는 사람, 여덟째,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입니다.
다른 복들은 추상적인 것들이지만, 세 번째 복은 ‘온유’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땅을 차지 하겠다는 것입니다.

‘땅’이라고 하는 것이 ‘부동산’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세상에서의 축복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유독 ‘온유’한 사람에 대해서만 특별히 땅에서 잘되는 축복을 말씀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온유한 마음’이 하나님의 축복도 받고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수 있는 최선의 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온유’는 온화하고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으로
인간 관계에 있어 화목하고, 참고, 인내하며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만들어주려고 하는 친절과 사랑에 관계된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온유’는 ‘물’과 같은 것입니다.
‘물’은 가장 약해 보이지만 가장 강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땅에 사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물’입니다.
거듭난 성도는 누구든지 온유한 성품으로 만들어 질수가 있습니다.
타고난 성품이 과격하든지, 인생의 고난으로 인해서 상처가 많든지, 사막의 아카시아처럼 비틀어진 마음이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의 불을 받으면 다 펴지고, 새 심령으로 만들어 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셨던 모든 사람들이 처음부터 온유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훈련과 고난의 과정을 거치면서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욱’하는 성품이 있어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잘라 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격이 급하면 베드로 같다고 말합니다.
그런 베드로도 나중에는 한없이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역시 칼같이 날카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나중에는 한없이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온유한 성품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데만 있는 것 아닙니다.
자신의 성품을 다듬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인 ‘온유와 겸손’의 성품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인 것입니다.

성경의 분량을 보면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관한 내용보다 자신의 인격을 다음어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라고 교훈하신 부분이 훨씬 더 많습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한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성품과의 싸움입니다. ‘죄’와의 싸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마음속에 죄의 성품이 남아 있기에 날마다 자신과 싸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사명이었지만 그 자신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야 하는 사명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또한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영어로 Sanctification 이라고 합니다.
이땅에서는 ‘말씀과 기도’ 그리고 ‘연단의 훈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성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면 ‘성화의 완성’이 이루어 집니다.
그것을 ‘영화’라고 합니다.
Glorification 입니다.
이땅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완전한 성화’가 ‘영화’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을 통해서 온유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때로는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과 씨름하며 사랑을 배우게 하시고, 슬픔의 파도 속에서 슬픔을 넘어서는 기쁨을 배우게도 하시고, 때로는 갈등 속에서 화평의 진리를 배우게 하시고, 때로는 견디기 힘든 환경에서 오래 참는 인격을 연단하게 하시고, 때로는 억지로 손해 보는 경험을 통해 관용을 배우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온 결과물로서 업적이 아닌 우리가 빚어 온 인격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진지하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가 얼마나 거창한 일을 하느냐”가 아닙니다.
날마다 부딪치는 일상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어떤 존재, 인격으로 빚어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의 욥은 아브람과 같은 족장시대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거창한 업적을 남긴 것이 없는 것처럼 ‘욥’이 무슨 거창한 업적을 남긴 것 없습니다.
업적이라면 그는 계속해서 다가오는 인생의 시련들을 무던히도 잘 견디고 인내한 것 뿐 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내 종(사랑하는, 의로운) 욥”이라고 계속해서 부르십니다.

‘야고보’는 ‘인내의 표상’으로 그를 소개합니다. 약5:11에 보면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다”고 증거합니다.

욥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그 지독한 고통의 순간들을 이겨 낼 수 있었을 까요?
욥23:10이 그 대답입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습니다.
그가 나를 아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나를 순금과 같은 인격으로 연단하시고자 함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잘 견딘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온유한 사람이고, ‘욥’도 온유한 사람입니다.
성경의 모든 위대한 신앙인들이 모두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온유한 사람이 어떻게 땅의 축복을 받을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은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다시 말하면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사람을 얻을수 있다는 말입니다.
가장 큰 축복은 사람을 얻는 축복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믿을수 있는 사람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평생을 같이 살아 갈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행복입니다.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행복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자신이 먼저 온유해져야 합니다.
향기 나는 꽃에 나비가 날라 오듯이, 온유한 향기가 있는 사람에게 좋은 사람들이 모여 드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자신이 먼저 희생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희생함으로 가장 많은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얻었습니다.
온유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
이땅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칼과 총으로 확장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유함으로 되는 것입니다.
로마는 온유한 성도들에게 의해서 기독교국가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로마에 의해서 몇백년 동안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 때문에 가족을 잃고 재산을 빼앗기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사자의 밥이 되어 죽어 갔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무력으로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때리면 맞고, 죽이면 죽고, 산속으로, 사막으로, 땅속으로 숨어 들어가서 믿음을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로마는 교회를 국교로 받아 들이게 됩니다.
교회는 칼한번 휘두르지 않고, 데모 한번하지 않았습니다.
‘촛불’들고 모이지 않았고, ‘태극기’들고 모이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온유’입니다.
창조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로마군사가 휘두르는 채찍에 저항하지 않고 맞고,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온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먼저 주셨습니다.
조금의 이기심도 없이 순수한 사랑으로 자신의 일생을 주셨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수없이 얻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먼저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솝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탉 두 마리가 결사적으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서로 피터지게 싸우다가 한 마리가 죽고 한 마리가 이겼습니다.
이긴 수탁은 신이 났습니다.
세상이 내것 같았습니다. 수탉은 더 뽐내고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붕으로 날아 올라 갔습니다.
그리고 꼬끼오 하고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가 이겼다 하고 소리칩니다.
그런데 마침 하늘을 날던 독수리가 있었습니다. 배가 고파 먹이를 찾고 있는데 왠 수탉이 지붕으로 날아 올라와서 나 여기 있소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독수리는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멘 하고 내려와서 수탉을 잡아 먹었다고 합니다.

중국의 장자가 한 말 가운데 ‘무용지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용지용’이라는 말은 ‘쓸모가 없는 것 같은데도 쓸모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생겨난 것은 ‘석씨’라고 하는 목수가 궁궐을 짓는 좋은 나무를 구하러 전국을 헤매는데 가다가 큰 상수리 하나를 만났습니다.
엄청나게 큰 상수리나무 였습니다.
천년은 살았을 것 같은 엄청 큰 나무인데, 이리저리 휘어져 있어서 궁궐을 짓기에는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수는 본척만척하고 지나갔습니다.

그 날 밤 꿈에 상수리나무가 이 석씨라고 하는 목수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야 이놈아 네가 나를 무시하고 나무로 취급을 안하는데 너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 는 것입니다.
네가 생각하는 좋은 나무는 향나무같이 멋지게 쭉 뻗은 나무를 생각하지만 내가 그랬을 것 같으면 어찌 천 년을 살 수 있었겠냐는 것입니다.
벌써 도끼에 찍혀서 끝났을 텐데 내가 이렇게 휘어지고 비툴어 져 있기때문에 잘리지 않고 이렇게 천 년을 살아 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복숭아나무, 대추나무, 감나무, 사과나무 같은 과일 나무는 모두 비툴비툴 자랍니다.
‘과일’은 맺을수 있지만 ‘가구’로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참 놀랍지 않습니까?
과일나무가 쭉쭉 뻗어 있으면 사람들이 잘라서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들어서 ‘과일’을 맺지 못하게 되고, 그리고 사람들도 과일을 먹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과일나무는 삐뚤빼뚤 하고,
특히 포도나무는 칡넝쿨처럼 휘어져서 포도열매 맺는 것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나무는 가구로 적당하고, 어떤 나무는 과일을 맺게 하시고.. 모두 한가지씩만 잘 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 사람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잘할수 있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에 완전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 잘하면 하나 못하고,, 그래서 모두가 서로 서로 필요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잘났다는 것 때문에 빨리 죽습니다.
조금 배웠다는 것이 넘어지게 만듭니다.
잘난 것, 배운 것, 유명한 것, 많이 가진 것 이런 것들이 인간을 함정에 빠트리는 것이고, 그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것입니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겸손과 온유’는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본 받아야할 성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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