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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5) 자비

성령의 열매(5) 자비 갈5:16-2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말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이 두 개를 합해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신앙과 생활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생활’이 같아야 온전한 ‘신앙생활’이 되는데 우리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은 좋은데 ‘생활’이 따라가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생활’은 좋은데 ‘신앙’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생 ‘훈련’을 하면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신앙과 생활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좋은 성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를 좋은 아버지라고 말하고, 좋은 어머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좋은 장로님, 좋은 권사님, 좋은 집사님, 좋은 성도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돈을 잘버는 사람’은 ‘능력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는 있는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학생’이 공부를 잘하면 ‘공부잘하는 학생’은 되지만 ‘좋은 학생’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좋은 성도’는 오직 ‘신앙과 생활’이 함께 할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성도가 됩시다…좋은 사람이 됩시다… ’

세상 사람들은 좋은 사람보다는 일단은 성공한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좋은 사람이 밥먹여 주냐? 좋은 사람은 좀 무능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 세상의 가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악인의 형통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과거에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으라’는 책 때문에 논란이 있은 적이 있습니다.
집안에 흐르는 저주가 있다고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가정에는 계속해서 악인이 생기고 의인의 가정에는 더 많은 의인이 생기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부인 할수 없는 사실입니다.

악인의 가정에 악인이 더 많이 생기는 것은 그 집안에 저주가 흐르기 때문이 아니라 부모의 인격과 성품이 자녀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 것입니다.

부모가 행복하게 살면 자녀도 행복하게 살 확률이 많고, 부모가 행복하게 살지 못하면, 자녀도 행복하게 살지 못할 위험성이 많습니다.

자녀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면 부모가 먼저 행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과 ‘생활’이 일치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사랑, 희락, 화평 그리고 오래참는 인내의 성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성령의 다섯 번째 열매인 자비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자비’와 같은 의미로 함께 쓰이는 단어는 ‘긍휼’입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자비’를 뜻하는 말 ‘라하밈’은 어머니의 ‘자궁’을 뜻하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자녀’를 품은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긍휼'(compassion)을 뜻하는 또 다른 헬라어는 ‘내장’을 가리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고 창자가 꼬이는 듯 한 ‘단장’의 아픔을 느끼는 것이 긍휼이고 자비입니다.
영어의 ‘컴패션'(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함께'(com)라는 말과 ‘아파하다'(passio)라는 말이 합해져서 만들어졌습니다.
한자의 ‘자비'(慈悲)는 ‘사랑’을 의미하는 ‘자’에, 슬픔을 뜻하는’비’자 입니다.

●‘자비의 핵심’은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조금 다른 말로 ‘동정'(同情, sympathy)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일할’ ‘동’과 ‘느낄 정’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어 sympathy도 역시 ‘곁에서 느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한 인간의 불행을 보시고 마음이 깨어지는 아픔을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야말로 자비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긍휼은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에게 저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시해도 될 인간을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버림받아야 할 인간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며 적극적으로 도와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사랑’인 것입니다

●자비, 긍휼은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우리가 죄와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에베소서 2:4-5)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힘입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엄청난 긍휼에 빚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하나님의 가슴으로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만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일만달란트의 빚’은 평생을 벌어도 갚을수 없는 큰돈입니다. 그런데 그런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큰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 은혜를 받고도 그 사람은 자신에게 아주 작은 금액의 돈을 빚진 사람을 잡아다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그 사람을 다시 잡아 오게했다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일만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남은 작은 허물을 용서해 주지 못하고 비난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대로 라면 잡혀서 다시 감옥에 가야할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길가다 강도만난 사람을 마지막 까지 책임져 주었던 ‘선한 사마리아인’같은 이웃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모든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인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첫째. 구원받지 못한 자에게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막 1: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마 9:23)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예수님의 마음은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 귀족이든 천민이든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이 없는 인생을 살면 그들을 심히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들도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솟아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고대광실을 지어놓고 살면 무엇합니까? 이 세상에서 출세하면 무엇합니까? 남보다 건강해서 몇 년 더 살면 무엇합니까? 결국은 구원받느냐 구원받지 못하느냐가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죽어서 지옥 간다면 그보다 불쌍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외모와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지만 그래야 잠깐입니다.
50이 넘으면 좋은 학교를 나온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별차이가 없어 집니다.
60이 넘으면 외모에 별 차이가 없습니다.
70이 넘으면 건강에 별 차이가 없습니다.
80이 넘으면 재물이 있으나 없으나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90이 넘으면 사나 죽으나 별 차이가 없어 집니다.
인생이 잘 나간다고 자랑할 것 없습니다. 잠깐입니다.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죽어서 어디로 가느냐가 진짜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보다 불쌍한 인생은 없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 대하여 이렇게 호소합니다. “우리가 영혼이 떠난 육신을 앞에 놓고 통곡을 한다면, 하나님을 떠난 영혼을 놓고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도전을 받아야 할 말입니다.

‘주님, 나의 마음속에 구원받지 못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심장과 같은 긍휼의 가슴을 주옵소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구조대원처럼 절박한 마음으로 죽어 가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살리는 자가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코로나’이후로 전도가 잘 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던 사람들도 나오지 않는데 불신자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그리고 ‘코로나’초기에 교회에서 집단감염들이 일어나면서 교회를 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더 차가워 졌습니다.
‘전도환경’은 더 나빠 졌지만 그렇다고 ‘전도의 길’이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구원받아야 할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구원을 받을수 있습니다.

요즘 같은 상황에서 ‘전도’하는 것은 ‘미련한 것’처럼 보일수 있지만,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법을 통해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코로나’걸리는 것보다 ‘지옥’가는 것이 더 불행한 것 아니겠습니까?
‘코로나’는 ‘백신’이라도 있지만 ‘지옥’가는 것은 ‘백신’도 없습니다.
‘전도’를 위해서 항상 기도하시면서 ‘기회’를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자비는 고통 당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마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엡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예수님의 마음은 긍휼 그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특별히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사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고통 당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민망히 여기셨다, 측은히 여기셨다, 때로는 아픈 가슴으로 함께 울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인간과 똑 같은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완벽한 실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들의 아픔과 고통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아픈 자의 상처를 사랑의 손으로 싸매 주시고, 눈물을 닦아주시며, 멍든 가슴을 어루만져 주시고, 치료해 주시며, 애절한 심정으로 민망히 여겨주시며 측은히 여겨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이런 긍휼의 가슴을 품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마 9: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우리 주변에는 고통을 당하는 분들이 항상 많습니다.
비난하기 보다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정한 손을 내밀수 있기를 바랍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하기를 “이웃집에 가서 물건을 빌려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아들이 이웃집에 갔다 와서 하는 말이 ” 빌려줄 수 없다고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에 바로 그 이웃에서 다른 물건을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하기를 “빌려 주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며칠 전에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는데요.”
그 때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빌려줄 수 없다“라고 하면 그것은 복수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려준다“라고 말하면서 그런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건 증오다.
거절당했다고 하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아무 상관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그저 필요하다니까 빌려준다 하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것이 긍휼이다.라고 했습니다.

인터넷을 보면 자기의 의견과 반대가 되는 사람은 면도칼로 난도질을 하듯이 난도질을 합니다. 집단 테러를 합니다.
인터넷에 난무하는 그 저주가 가득한 글들을 보면서 우리 민족이 이만큼 잘살게 되었는데 뭐가 더 부족해서 저리도 가슴에 한을 품고, 저주를 품고 살고 있을까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을수 없습니다.

자원도 없고 주위에 강대국에 싸여 있는 나라에서 서로 힘을 합해도 살아날까 말까한 나라에서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두 부류의 사람들이 저렇게 악심을 품고 있으니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런 민족을 축복해 주셔서 복음의 국가로 만들어 주시고, 이만큼 잘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일 것입니다.

얼마전에 미국의 고등학교 농구게임에서 한 학교가 다른 학교를 161대 2라는 어마어마한 차이로 승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승리한 고등학교 농구고치는 해임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잘했다고 칭찬을 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어떻게 그렇게 묵사발을 만들 수 있냐고.. 그런 인격을 가진 사람은 ‘코치’의 자격이 없다고..그래서 경기후에 ‘해임’이 되고 말았습니다.
‘승리’는 좋은 것이지만 그렇게 ‘무자비한 승리’는 칭찬을 받지 못합니다.

‘패배자’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정서’이고 ‘마음’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런 ‘자비’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더 높은 차원의 ‘자비’가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한국의 소설로서 처음으로 미국에서 크게 보도된 신경숙씨의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이 있었습니다.
한국 소설로는 처음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소설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과거 한국의 어려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여자주인공’이 자식들을 먹이려고 방아간에서 밀가루를 빻아가지고 집으로 돌아 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와서 밀가루를 자전거로 실어다 준다며 접근합니다.
밀가루를 자전거에 실자 마자 그 남자는 도망쳐 버립니다.
아이들을 먹일 밀가루를 빼앗긴 여자는 수소문을 하여 그 집을 찾아냅니다.
화가 잔뜩난 마음으로 그 집에 도착해 보았더니 밀가루를 도둑질한 사람의 아내가 막 아이를 낳기 위해서 해산의 진통을 하고 있었습니다.
‘밀가루’를 훔쳐간 남자에게 뭐라고 하기도 전에 해산을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당황해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어떨결에 산모를 도와서 아기를 받아 내었습니다.
그리고 도둑 맞았던 밀가루로 급히 수제비를 만들어 온 가족을 먹입니다.
이 남자는 아내가 해산을 하는데도 먹을 것이 없어 밀가루를 훔쳐온 것입니다.
여자는 화가 났지만 딱한 사정을 알고 발걸음을 돌립니다.
집에 돌아와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역국을 끓여서 그 집을 다시 방문합니다. 다시 가보니 산모는 해산 후유증으로 이미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태어난 아이에게 젖을 먹일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기도 갖난 아니를 기르고 있던 터라서 틈 나는대로 그 집에 찾아가 엄마 잃은 아이에게 젖을 먹였습니다
자기딸에게도 부족한 젖이었지만, 몰라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박소녀씨의 사랑은 자기의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까지 넘어 갔습니다.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 소설을 읽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자비와 긍휼’의 마음은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짐승’에게는 ‘양심’도 없고 ‘자비’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을 ‘원숭이’의 후손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마음이 얼마나 강팍한지 모르겠습니다.

로마서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찾고 싶어 하지도 않고 생각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금새 알수 있는 것인데 그런 생각조차 하기를 싫어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간단히 알수 있는 것인데 알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 오기전 25년 동안은 완전히 교회 밖에서 살았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저를 공항에 픽업해 주신 분이 그 다음주에 교회에 가자고 해서 따라 갔다가 목사님의 설교중에 ‘창조’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에 ‘머리속에 불이 반짝’하고 켜 졌습니다.
‘창조라니??’ 학교에서 ‘진화론’만 배웠고 인간은 원숭이의 자손이다 라고 만 생각하고 있다가 ‘하나님의 창조’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에 반짝하고 생각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왜 인간만이 동물에게는 없는 ‘양심’이 있고 ‘자비와 긍휼’의 마음이 있을까?
‘생각의 문’이 열리면 인간은 짐승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깨닫지 못하는 것은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갈수록 강팍해 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인심도 갈수록 인색해 지고 있습니다.
이민자의 천국이었던 미국도 이민자에 대해서 문을 닫고 있습니다. 법도 엄격해 지고 있습니다.

‘바이든’이 대통령이 되고나서 신문에 트럼프가 만들어 놓은 ‘유학생’ 거주 제한법을 다시 없애버렸다고 하는 기사가 났습니다.
‘트럼프’는 유학생 비자를 ‘2년’ 혹은 ‘4년’으로 제한을 했습니다. 유학생들을 4년으로 제한을 두어 더 이상 미국에 있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전에는 공부하고 싶은 만큼 공부할수 있게 제한을 두지 않았었는데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서 제한을 둔 것입니다.
그것은 ‘비인도적’이고 세계 최고의 나라라고 하는 미국이 해서는 안되는 일인 것입니다.
미국이 진보나 보수나 모두 잘못된 길로 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어느때 보다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야 할 때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제정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성도들이 심각하게 기도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는 말이 있듯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여유가 있어야 남에게 인심을 베풀게 됩니다.
세상의 인심이 저수지와 같다고 하면, 하나님의 마음은 바다와 같습니다.
저수지는 가뭄에 말라 버릴수가 있지만, 바다는 언제나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바다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바다 보다 크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시편 103:13-15).
과거에 교회건축을 할 때 일입니다.
건축을 하시는 분중에 매주 돈 달라고 독촉을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매주 조금씩 공사금을 받아 가면서
일거리가 없어서 힘들게 살가가는 분이 었습니다.
한번은 그분에게 주었던 수표가 잘못되어서 바운스가 났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한바탕 야단을 치겠구나 생각을 하고 그분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수표가 돌아갔는데 다시 입금을 시켜 주면 고맙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반응은 의외로 뜻밖이었습니다.
‘괜찮다는 것입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입금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것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저에게 고맙다는 것입니다.
이유인 즉슨 그동안 일거리가 없어서 일하는 아이들에게 봉급도 제대로 주지 못해서 힘들게 오다가, 요즘 갑자기 일거리가 몇군데 같이 생긴것입니다. 당분간 일걱정, 돈걱정 인건비 걱정 안해도 되게 된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고 갑자기 천사가 되어서 은혜스러운 말을 술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햐! 천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구나’ 배부르고 여유가 있으면 천사가 되고, 부족하고 배가 고프면 마귀가 되는 구나’ 생각을 했었습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많으면 여유가 있지만 모자르면 인색하고 빼앗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것입니다.
성도는 항상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없어도 여유가 있어야 하고, 모잘라도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피해를 보아도 여유가 있어야 하고, 핍박을 받아도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요, 그것이 신앙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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