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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3) 화평

성령의 열매(3) 화평 갈5:16-24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중세기 산중 높은 곳에 위치한 어느 수도원에 이른 아침부터 누군가가 문을 두드립니다.
사제가 나가보니 무척 피곤에 지쳐 보이는 중년 사내가 서 있었습니다.
“누구를 찾으시나요?”, “예, 저는 평화를 찾습니다.”
그가 바로 단테 알리기에리 (Dante Alighieri,1265-1321) 였다고 합니다. 그의 유명한 명작인 ‘신곡’ 에서 그가 여행한 지옥과 연옥 그리고 낙원의 이야기는 인생의 도상에서 경험하는 삶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옥’이라고 하는 개념은 카톨릭에서 말하는 것으로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남은 죄를 씻기 위하여 불로써 단련 받는 곳.’ 으로 성경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의 삶에서는 그런 비슷한 상태가 있을수 있습니다. 천국의 삶도 아니고, 그리고 지옥 같은 삶도 아니고,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그 중간쯤에서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의 인생의 모습일 것입니다.

옆에분들에게 한번 물어 보십니다.
당신의 오늘은 어떻습니까? 지옥입니까? 천국입니까?
단테는 그가 인생의 전반전에 경험한 상처를 끌어안고 평생 평화를 찾아 헤맨 영혼의 순례자였습니다.
외로운 방랑자 단테는 마침내 그의 영혼의 진정한 평화를 찾기 위해 그의 나이 43세가 되던 해 붓을 들어 무려 13년간에 걸친 신곡의 글을 쓰며 영혼의 순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책이 완성된 다음해 (1321년,56세 되던 해) 그는 주님의 품안에서 비로소 평화를 발견하고 눈을 감습니다.

단테가 고민하고 경험했던 이야기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평안이 있는곳, 평화로운 곳을 찾아 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평화에는 세가지 평화가 있습니다.
첫째, 외적인 평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사이, 국가와 국가간의 평화를 말합니다.
둘째, 내적인 평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속의 평화입니다.
셋째, 영적인 평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이 평화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위에서 주시는 능력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얻으면 언제 어디서나 평안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는 성령의 열매인 평화는 이것을 말합니다.
화평, 평화, 평안, 평강은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 가면서 필요한 많은 것 중에 평화를 빼 놓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지난 두 주간에 걸쳐 성령의 열매, 사랑과 기쁨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사랑과 기쁨은 우리의 삶에 생명이요 활력소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살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과 기쁨도 평화가 없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가져도 마음의 평안이 없으면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에 불과합니다.
마음의 평안은 본질적인 삶의 축복으로, 이 평안은 우리의 삶에 가장 근원적인 필수 조건입니다.

평안하지 못하면 음식도 맛이 없습니다. 가정이 평안하지 못하면 집에 들어가기가 싫습니다. 아이들도 바르게 자라지 못합니다. 평안이 없으면 발전도 없고, 창조적인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평안을 잃어 버리면 긴장하게 되고, 건강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잠15:16)’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17:1)’마른 떡 한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 보다 나으니라’

평화가 없으면 애써 지은 것도 파괴됩니다.
평화가 없으면 발전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유엔을 만든 것도 국제사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평화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성가중에서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평화는 누구나 원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평화를 깨트리는 말과 행동을 할 때가 더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는 평화를 결단코 원하지 않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사탄과 마귀입니다. 이 놈들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사는 것을 눈을 뜨고 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기를 쓰고 평화를 깨뜨리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분들이 평화롭게, 행복하게 사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어둠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평화를 깨뜨린 존재가 사탄이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가정을 깨뜨리고, 가인과 아벨 형제의 평화를 깨뜨렸습니다.
지금도 마귀는 평화를 깨뜨리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탄이라고 하는 영적인 존재 있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여러분의 평화는 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인생의 평안을 가지려고 아무리 애써도 어둠의 권세 사탄을 막지 못하는한 여러분은 절대 여러분이 원하는 평화를 가질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암흑과 혼돈의 세상에서 평화를 얻고, 평화를 만들고, 평화를 유지할수 있겠습니까?

첫째, 오직 십자가의 사랑으로 화평을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나실 때부터 평화의 왕으로 나셨습니다. 베들레헴에 나실 때 허다한 천군과 천사가 함께 찬송하며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중에 평화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셧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요14:27)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23)
예수님은 평화를 주러 오셨고, 또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떨고 있을 때 친히 찾아가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셧습니다.
예수님은 오실때도 평화요, 떠나실때도 평화요, 부활하신 후에도 평화였습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가 평화를 위한 활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시고, 평든자를 고치시며, 죄지은 자를 사해 주시고, 소외자들을 위로하신 그 모든 활동이 하나님의 평화운동 이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은 인류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케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평안은 평안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만이 사탄의 권세를 이길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화평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갈 5:16-18)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예수를 믿게 되면 내 안에서 두 성품이 싸우게 됩니다.
육체의 욕심, 죄의 성질과 성령님의 성품이 싸우게 됩니다.
모든 싸움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 집니다.
사람이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육체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평화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과 평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타인과 잘 다투는 사람은 자신의 내적인 갈등이 심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평화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자기 자신을 다스릴수 있는 사람은 남과 싸우지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평화가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도 평화를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정생활에서, 사회생활에서, 그리고 교회생활에서 시험들고 갈등이 심한 것은 자신의 마음에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댑니다. 이것 때문이다, 저것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와 말들을 갖다 붙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평화가 없기 때문에 다른 것과도 화평을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평안이라고 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불완전한 속에서 필요한 것이 평안입니다. 모든 것이 만족 스럽고, 모든 것이 완전하다면 평안이라는 말이 왜 필요합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평안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평화가 깨어져 버린 세상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균형이 깨어지고, 망가져 버린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불안하고, 걱정, 염려 할것이 태산 처럼 쌓여 있는 세상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안과 밖으로 평화가 깨어져 버린 상태에서 인간의 힘으로는 평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끝없이 솟아나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 욕구는 이 세상 무엇으로 채울수가 없습니다. 솔로몬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들을 다 가져 보았습니다.
(전 2:4-11)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사람들은 솔로몬의 이런 고백을 들으면서도 전혀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러워 합니다. 후회해도 좋으니 그렇게 한번 살아 봤으면 좋겠다. 나중에 지옥에 갈 지언정 그렇게 살아 봤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들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어차피 힘든 인생 그렇게라도 살아 보았으면 원이 없겠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많은 분들의 눈빛이 그런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육신의 생각을 바르게 잡아 줄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인 것입니다. 영의 사람이 될 때 영적인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억만금을 얻어서 은혜가 아니라 세상의 억만금으로 얻을수 없는 화평을 얻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
평화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셋째, 자족하는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다.
(빌 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자족은 스스로 만족하는 마음입니다. 만족은 남이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남이 만들어 주기를 원하는 사람은 평생 만족할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족하는 것을 배웠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족은 스스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만족한 상황이 아님에도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 자족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가치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현재 나이가 50인 사람은 50년전에 태어난 사람가운데 반은 세상을 떠나고 남은 반에 속한 것입니다.
60인 사람은 60년 전에 태어난 사람가운데 60%는 죽고 남은 40%에 속한 사람입니다. 70인 사람은 70년 전에 태어난 사람가운에 남은 30%에 속한 사람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훨씬더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감사는 내가 만들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속에 평안이 만들어 집니다.
감사가 없으면 평안도 기쁨도 사랑도 없는 것입니다.
자족은 나를 낮출때 할 수가 있습니다. 교만하면 자족할수 없습니다. 나를 높이 생각하면 자족할수 없습니다.
내가 뭔가 되는 사람처럼 생각하면 자족할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낮추었던 것 처럼, 바울이 자신을 죄인의 괴수로 낮추었던것 처럼, 나는 지금의 축복을 누릴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자족할수 있습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배아파 하면 자족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가 잘되야 합니다. 남이 잘되길 빌어야 자신도 잘됩니다. 남의 축복을 빌면 그 축복이 나에게도 임하고, 남의 평강을 빌면 그 평강이 나에게도 임하는 것입니다.

넷째,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열매는 열매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열매는 또다른 열매를 맺기 위해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먹이가 되어서 또 다른 생명을 살리는 것이 열매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의 특징입니다.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축복은 남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평화 역시도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 너로 인해서 만인이 복을 받을 것이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될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무리 복을 받아도 잘못되지 않을 것은 남을 위해서 베푸는 축복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의 모든 열매들도 남을 위한 열매들입니다.
(고후5:17)”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여기에서 말하는 우리는 예수믿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평화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이 평화가 아닙니다.
죽은 평화가 있고, 살아있는 평화가 있습니다.
죽은 평화는 공동묘지에 가면 볼수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분쟁이 없습니다. 시끄러운 잡음도 없습니다.

어린아이때는 시끄럽게 노는 것이 평화입니다.
직장은 시끄럽게 기계돌아가는 소리가 있는 것이 평화입니다.

교회는 시장통같이 북적거리는 것이 평화입니다.
마귀에게 붙잡혀 있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씨름을 하는 것이 평화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몸이 피곤해 지는 것이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하루종일 피곤하게 일하셨습니다. 온몸에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것이라.’
주님을 섬기시느라 피곤하십니까? 몸이 녹초가 되십니까?
여러분들은 평화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수고가 평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희생이 없는 곳에는 평화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평화가 있고,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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