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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야기(35) ‘쉬고 싶으십니까?’

복음이야기(35) ‘쉬고 싶으십니까?’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대 하셨습니다. ‘수고 하고 무거운 짐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우리에 ‘쉼’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현실적으로 제일 반가운 말씀일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고, 천국의 약속을 받는 것이 가장 기쁜 소식이지만, 현실적으로 제일 갈급한 것은 ‘쉼’일 것입니다.

파스칼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가 앉아 휴식할 줄 모르는 데서 비롯된다.”

현대사회는 ‘경쟁사회’입니다.
사람의 가치를 ‘생산성’이나 ‘성취’에 의해서 평가를 하는 세상입니다.

과거 농경시대에는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성실하면 되었습니다.
밭이 많은 사람은 많이 수확하고, 밭이 적은 사람은 적게 수확하는 것이 당연 했습니다.
가뭄이 나면 모두가 같이 가뭄이 나고, 풍년이 나면 모두가 같이 풍년이 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현대문화는 치열한 경쟁입니다.
같은 골목에서 장사를 해도 어떤 집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옆집은 파리를 날리고 있습니다.

요즘 삼성전자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작년보다 이문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손해를 본 것이 아닙니다. 몇조원이나 되는 이문을 남겼습니다. 그런데도 위기라고 걱정들을 하고 있습니다.
계속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우리 올림픽장로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좋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고, 성도님들도 착하고 성실합니다.
그리고 숫자적으로도 10%안에 드는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우리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보다 큰 대형교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비교하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작게 여기고 있습니다.

미국에 사는 것 자체가 큰 축복이라고 말들은 합니다.
인류역사에 가장 강한 나라이고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켈리포니아는 미국에서도 날씨가 제일 좋은 곳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행복하게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세상에는 우리들 보다 훨씬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감사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보다 더 잘사는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부족하고 모자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피말리는 경쟁의 문화 속에서 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잘 쉬어야 됩니다.
그래야 자기의 발전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느때 보다 진정한 쉼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쉼’은 낭비가 아닙니다.

사람의 숨쉬는 것을 호흡이라고 합니다.
호(呼)는 숨을 내쉬는 것이고, 흡(吸)은 공기를 빨아 들이는 것입니다. 평생을 호흡을 하면서 살지만 숨쉬는 것도 쉬어가면서 쉬어야 합니다.
여러분, 테스트 해 보세요. 쉬지않고 숨을 쉬어 보세요 몇분이나 버틸수 있나..

쉬어야 한다고 하면 항변을 하고 싶어 하실 분들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이 사람아 누가 안쉬고 싶나? 나도 좀 쉬고 싶어..그런데 쉴 형편이 못죄니까 못쉬는 거지..

남들처럼 남태평양 아름다운 섬 야자수 밑에 가서 쉬어 보고 싶고, 크루즈를 타고 세계를 타니며 쉬어 보고 싶기도 하지만 형편이 안되니까 못쉬는 거지…
예 맞습니다. 쉬고 싶은데 쉴 형편이 안되니까 못쉬는 것이고… 그런데 생각해 보면 쉬지 못하는 것이 환경일수도 있지만 자신의 마음에 여유가 없는 것이 쉬지못하게 하는 더 큰 원인일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서 제일 먼저 하신 것은 쉬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을 안식일이라 불렀습니다.
안식일은 십계명의 4번째 계명인 중요한 계명입니다.
다시 말하면 쉰다는 것은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꼭 지켜야 하는 의무인 것입니다.

참 재미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강제로 쉬게 하셨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실때 부터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하루에 1/3인 8시간은 잠을 자게 인간의 육체를 만드셨습니다.
인간이 쉬어야 하는 것을 제일 잘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밤에는 쉬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도 쉬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비록 안식일의 근본의미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율법적으로 라도 철저히 지켰습니다.
로마는 유대를 정복하고 로마의 문화로 바꾸려고 했습니다.
다른 나라는 다 되는데 유대인들만은 안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되면 일체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을 안하면 죽였습니다. 그래도 유대인들은 죽으면서도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수 없이 유대만은 유대인들의 문화를 가지게 했습니다.
나중에 역사학자들은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들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안식일을 지킴으로 인해서 유대인들은 오늘날 까지 수천년이 지났음에도 그들의 신앙을 가질수 있게 된것입니다.

과거에 다저스 팀의 핵심선수인 숀 그린이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느냐 마느냐 하는 중요한 때 였는데 유대인의 가장 중요한 절기인 대 속죄일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숀 그린은 유대인인데 대속죄일에는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중요한 시합이 걸린 것입니다.
숀 그린 선수는 고민을 하다가 다저스팀과 합의를 보았습니다. 원래는 이틀을 빠져야 하는데 중요한 시합이기 때문에 하루씩 양보를 해서 하루만 빠지기로 한 것입니다.
다저스구단도 유대인들의 전통을 알기에 이해를 해 준 것입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신앙 때문에 갈등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보시면서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켜 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우리를 지켜 준다는 사실을 기억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지켜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온전한 안식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키는 지켰지만 그것이 율법이 되어서 또 다른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진정한 안식, 진정한 쉼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라고 말씀하지 않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쉼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피곤함은 일을 쉬고 잠을 푹자고 그러면 육체적인 피곤함은 회복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스트레스는 정신적인 것이고 마음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해야 참된 쉼을 얻을수가 있습니다.
‘온유와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온유한 마음은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입니다.
남을 배려 하는 마음이요 이해심이 많은 마음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두가지를 물려 받습니다. ‘외모와 성품’입니다.

좋은 외모를 가지는 것도 축복이지만, 그보다 더 큰 축복은 좋은 성품을 가지는 것입니다.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은 은혜를 받아도 아름답게 받습니다.

성품이 비뚤어진 사람은 은혜를 받아도 갈등이 많습니다. 사람과 잘 부닥칩니다.
그래서 참된 쉼을 가지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능력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성경의 목적입니다.

성령님의 열매도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그리고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말씀의 사람, 성령의 사람은 반드시 온유하게 됩니다.
마음이 사납고 급하면 쉼을 얻을수 없습니다.
그런 분은 남태평양 야자수 밑에 가서도 성질을 부릴 것이고, 크루즈른 타고 최고의 대접을 받으면서 있으면서도 지루하다고 불평을 할 것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면 모든 환경을 초월해서 쉼을 얻을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해야 옥토같은 마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옥토같은 마음이 되어야 온전한 믿음을 가질수가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나를 완전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과’는 ‘평안’입니다.
믿으면 마음이 평안합니다. 마음이 평안하면 쉴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불안하면 쉴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불안하면 긴장하게 됩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 수많은 위협속에서 평안을 유지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명이 끝나는 날 까지는 어느 누구도 나의 머리카락 하나 건드릴수 없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땅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불러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필요로 하시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한 우리의 생명은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었던 ‘욥’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욥기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온유와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에서 구별되어 거룩함을 이루고, 하나님앞에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은 완전하며 그분의 사랑도 완전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요동쳐도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의 삶도 고통이 전혀 없고, 고민이 전혀 없는 삶은 없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은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합니다.
믿음의 반대는 의심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입니다.
세상은 부정적인 것 투성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부정적인 것 투성이입니다. 우리의 과거도 실수와 허물 투성이 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가 아무리 사고를 쳐도 소망을 가집니다. 언젠가는 철이 들것이야.. 언젠가는 잘될것이야…
과거에 100번 실패를 했어도 이번에는 성공할거야…
그런 마음으로 기대를 가집니다.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믿음이요, 소망이요, 사랑입니다.
그것이 긍정적인 마음입니다.
그것은 인위적인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이요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흔들리는 세상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을수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에 안식이 있습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안식은 주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아무리 좋은 믿음을 가져도 복잡한 사건이 계속 생기면 쉴수가 없습니다.
(삼하 7:11)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왕상 5:4)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대적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
(대하 15:15)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 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하나님이 주위 사방을 평안케 해 주셔야 우리가 안식할수 있는 것입니다.

안식은 주님이 주시는 귀한 선물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키는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을 주셔야 육신의 안식, 마음의 안식, 그리고 영혼의 안식이 우리의 영혼은 진정한 평안을 누릴수가 있습니다.
주님을 신뢰함으로 여러분에게 이런 평안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구절 가운데
(잠 16:7)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면 친구라도 원수가 되게 하느니라… 그말입니다.

모든 것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
우리의 삶에 평안을 주십니다.
원수가 없게 만들어 주십니다.
집안에 우환이 없게 해 주십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면 평안하지 못합니다.

참된 안식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만들어 집니다.
인간의 삶에서 안식이 깨어진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서부터 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으면서
이땅의 모든 생명체는 고통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부부가 싸우고, 형제가 싸우고, 땅도 짐승도 인간의 삶을 거스리는 피곤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안식하는 날입니다. 생존을 위해 벌이던 경쟁과 싸움을 잠시 그치는 날입니다. 모든 갈등 행위를 멈추고 하늘의 평안을 누리는 날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함께 평화를 누리는 날입니다.
모든 걱정과 두려움, 염려와 긴장으로 부터 해방되어 내면의 평안을 누리는 날입니다.

지친 영혼이 말씀과 찬양과 기도로 힘을 얻고 기진해진 육체가 쉼을 통해 회복되는 날입니다.

시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고, 내면을 성찰하며, 노동과 수고로 부터 쉼을 얻고, 속된 것을 멀리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쉬는 날입니다.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쉼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부족한 모습 이대로 받아 주시고 내게 와서 쉬라고 하셨듯이
우리도 서로의 모습 그대로 받아 주고
상대방에게 쉼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구약의 안식일 계명을 단순히 폐기하지 않고 넘어 완성하심으로 주일 안식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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