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야기(38) 하나님 아버지

복음이야기(37) ‘하나님의 꿈’
January 7, 2024
복음이야기(39)고난과 영광
January 7, 2024
복음이야기(37) ‘하나님의 꿈’
January 7, 2024
복음이야기(39)고난과 영광
January 7, 2024

복음이야기(38) 하나님 아버지

복음이야기(38) 하나님 아버지 로마서 8:14-16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예수를 믿는 것을 여러가지로 표현을 합니다.
중생했다, 거듭났다. Born again 했다. 라는 말을 합니다.
다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새로운 부모를 가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신비한 체험입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을 보고 부러워 하기도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신비한 체험을 합니다.
한사람도 예외없이 신비한 체험을 합니다.
우리는 환상을 보거나, 꿈을 꾸거나, 병자가 고침을 받거나 해야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보다 더 큰 체험은 거듭 태어나는 체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체험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 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신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자연스럽게 부를수 있지만 불신자들은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마치 엽집 아저씨를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나의 아버지가 아닌 사람을 아버지라고 쉽게 부를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앞에서 아버지라고 부를수 있습니까? 나의 아버지 부처님 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어 보신적이 있습니까?
롬8:15 말씀에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양자의 영’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양자의 영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받는 축복중에서도 제일 큰 축복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수있는 축복입니다.

‘아버지’ 라고 하는 단어는 많은 의미를 가져다 줍니다.

현대의 아버지들은 괴롭다고 어떤 학자는 지적했습니다.
과거의 아버지는 집안에서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고 집안을 호령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아버지들은 피곤하고 지쳐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아랫사람, 윗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치열한 경쟁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정의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중압감이 있습니다.
아내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자식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것이 현대의 아버지들입니다.

아버지들은 고독합니다.
앞에서 큰소리 치고 대접을 받고 사는 것 같지만
치열한 경쟁속에서 비틀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라고 하는 단어속에는 원망과 애처로움 그리고 연민이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마치 어두운 골목길에 술이 취해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모습, 그것이 현대 아버지들의 모습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들의 고민과 사랑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외형적으로 나타난 권위주의적인 모습때문인 것 같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이야기 하면 어머니의 사랑을 이야기 하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는 별로 말을 하지않습니다.

어버이 주일에 부르는 ‘나실제 괴로움 다잊으시고’ 하는 노래도 내용을 보면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내용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똑 같지만 어머니의 사랑이 더 크게 보이는 것은 어머니는 직접 낳고 기르면서 자녀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밖에 나가서 일하고 집에 오면 아무것도 안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는 아버지들의 많다 보니 어머니의 사랑이 더 크게 보이게 됩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드러난 사랑이라고 표현한다고 하면, 아버지의 사랑은 숨겨진 사랑이라고 할수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넓다고 표현한다고 하면, 아버지의 사랑은 깊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넓은 것은 눈으로 보이지만 깊은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이 보이는 눈물이라고 하면, 아버지의 눈물은 보이지 않는 눈물입니다.

어머니라고 하는 단어에서 따뜻함을 느낀다면, 아버지라고 하는 단어에서는 쓸씀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또 한분의 아버지가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만세전 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모든 것을 계획하시는 아버지 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우리 보다 몇십년을 일찍 세상을 떠나시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입니다.

한사람의 아버지만 있어도 행복한데 우리에겐 두분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는 부요한 분이십니다. 그는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입니다.
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 이십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 아버지 하나님은 큰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엡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엡3: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합한 것 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의 사랑은 한계가 있습니다.
상대방의 허물을 받아 주다가도 자신의 인내의 한계에 다다르게 되면 더 이상 받아 주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녀가 어떤 허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 받아 줄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받아 주지 못하는 것도 부모는 받아 줍니다.

가정을 home sweet home 이라고 하는 이유는 나를 받아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허물이 있어도 허물을 탓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정에 들어가면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가 받아 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칼같이 날카로우면 사람들이 붙지를 않습니다.
이사람도 받아 주고, 저사람도 받아 주고 하는 사람에게 많은 사람이 찿아 오게 되는 것입니다. 편안해야 찿아 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와도 편안함을 느낄수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서로 받아 주어야 합니다. 어떤 허물이 있어도, 어떤 과거가 있어도, 어떤 핸디켑이 있어도 그것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서로 받아 주는 교회가 될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허물을 서로 받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받아 주는 교회가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받아 주는 교회에 평안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받아 주지 못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부모들 조차 우리를 받아 주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든지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는 받아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대표적으로 묘사한 이야기 입니다.
방탕한 탕자를 아무도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와 가깝던 친구도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사람도 탕자를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의 피를 나눈 형까지도 탕자를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고 형이 동생을 받아 주어야 하는데 형마저 동생을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사랑은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받아 주었습니다.
받아 준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먼저 달려나와 맞아 주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317장)“어서 돌아 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어찌 못 감당하고 못받으시리요, 우리주의 넒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보면 양손을 벌리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저는 주님께서 우리 이만큼 사랑하신다는 것 같이 느껴 입니다. 그리고 두손을 활짝 벌리고 우리를 받아 주시는것 같이 느껴 집니다.

어떤 죄인도, 어떤 허물이 있는 사람도 받아 준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받아 주지 못하는 어떤 허물도 우리 하나님은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받아주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허물이 허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모든 것을 다 사랑하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라도 탓할줄 알았는데 한마디 꾸중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언제나 따뜻하게 받아주시고 감싸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크고 넓으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신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는 말씀으로 온 우주를 만드신 능력의 아버지 입니다.
세상의 아버지는 자식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 못해서 뒤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어떤 아버지는 자신의 무능함을 한탄하며 애타합니다.
때로는 죽음앞에 비틀거리기도 합니다.

김정현씨가 쓴 “아버지”라고 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소설에 나오는 ‘한정수’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인생의 황금기에 췌장암 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이제 몇 달밖에 살지 못하는 자신의 운명앞에 방황을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과 딸을 두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자신의 운명앞에 주체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눈물”이라고 하는 연극이 있었습니다. 그 연극에서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보험금을 타주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교통사고를 당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가족은 사랑하지만 인간이기에 가족들을 돌아 볼수 없는 처지가 되기도 합니다. 죽음앞에 무릎을 꿇기도 합니다. 가족들의 애절한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먼저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란 단어속에는 애처로움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해주지 못하는 모든 것을 할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아버지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도 남으시는 아버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살려 내신 분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이 우주를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그에게는 모든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죄로 물든 세상을 홍수로 멸하시고 노아의 가정을 구원하셧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가정을 통해서 새로운 인류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홍해를 갈르시고 , 요단강을 갈라서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게도 하시고, 40년동안 만나를 내려서 인도해 주셨습니다.
불에서 구해주시고, 물에서 구해주셨습니다.
칼과 창에서 구해주셨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이땅에 있는 모든 자녀들을 일일이 돌아보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땅에 있는 모든 교회의 주인이 되시며 교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교회든지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특히 교회를 구입할때 라든지 건축 할때보면 모두 기적같은 일들을 체험하곤 했습니다.
1997년에 올림픽길에 땅을 구입해서 교회를 건축할때 입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는 우리 교회의 성전건축에도 도와 주셨습니다.

첫째는 땅을 구입하는데 30%만 다운하고 구입할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땅을 구입하는 것은 40%의 다운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30%만 다운을 해서 보다 적은 금액을 준비하게 해 주셧습니다

둘째, 평소에 건축헌금을 준비해 오지도 못했는데 한달안에 준비금으로 26만불의 돈을 마련하는 것을 이루게 해 주셨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점에서 단시간내에 돈을 모은 다는 것은 기적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여러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셋째, 그다음은 융자를 얻는 일이었습니다.
자동차를 사려고 해도 크레딧이 좋지 않으면 차를 구입할수 없습니다. 자기의 돈을 일부를 먼저 디파짓을 해도 크레딧이 없으면 차를 구입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대신 콜싸인을 해주어야 합니다. 크레딧이 나쁘면 자신의 이름으로는 살수가 없고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사야합니다.

그리고 교회이름 만으로는 융자를 해주지 않습니다.
교회는 저당 잡힐것도 없고, 교회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 책임을 물을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교회이름만으로는 융자를 해주지 않습니다.
주위의 교회들이 건축을 할때 보면 몇사람의 집이 저당잡혀야 겨우 힘들게 융자를 얻을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열사람이상의 집을 저당하고야 겨우 융자를 받을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융자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유일한 남은 길은 은행에서 교회이름으로만 해주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런 예는 없었습니다. 은행은 자신들이 나중에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무엇을 저당잡든지 잡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에스크로를 끝낼수 있는 돈을 거의 마련해 가자 은행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제 융자신청을 해야 하니 만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님과 은행에 가면서도 마음에는 걱정이었습니다.
은행측에서 무엇을 요구할것인가?
속으로는 성령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융자담당자와 만났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어떤 느낌이 왔습니다.
성령님이 저사람을 붙잡고 있는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담당자를 만나서 이야기 하는데 잘하면 아무 담보나 콜 싸인없이 순전히 교회이름으로만 해줄수 있을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만나고 나올때 까지 그 사람이 콜싸인할사람이나, 담보이야기를 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른 은행을 나와서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발 뭐 다른것 가져오라 말 안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런데 끝나기 몇일전에 연락이 왔는데 저와 장로님의 소셜시큐리티 카드를 카피해서 보내라는것입니다.
그소리를 듣자 가슴이 철컹 내려앉는 것입니다.
다른 담보는 잡지 않는 대신 담임목사 크레딧은 보자는것입니다.

그런데 제 크레딧으로는 지금 자전거 한대로 살수 없는 형편입니다.
목사가 크레딧이 엉망인것이 챙피한 이야기지만 성도님들 보증 해 주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크레딧 기록을 보고 나면, 이것 가지고 안되니 다른 보증할 사람을 데려오라고 할텐데 큰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은행측에서 마지막 에스크로 싸인을 하는 그날까지 아무 소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에스크로 캄퍼니에 가서 은행융자담당하시는 분과 같이 만나서 그땅을 구입하는 모든 서류에 마지막 싸인을 하는데 그자리에서 저를 보면서 한마디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크레딧이 영 안좋던데요’
이분이 저의 크레딧이 엉망인 것을 알면서도 담보도 잡지 않고 우리 교회앞으로 융자를 해 준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크레딧으로 안되니까, 하나님의 크레딧을 주시고, 우리가 담보 잡힐 집이 없으니까 천국의 황금집을 담보로 해서 빌려 주게 한것입니다.

은행의 론담당자는 처음부터 우리교회로 땅을 건내주기로 작정한 사람같이 일사 천리로 일을 진행시켜 주었습니다.
우리가 필요하다는 서류를 다 같다 주었더니, 은행서 밤12시 까지 야근을 하면 이틀만에 모든 서류를 다 끝내주었습니다.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그 마음을 주장하신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적같이 한달만에 올림픽에 있는 금싸라기 같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다른 교회들이 성전건축을 하는 것을 보고 부러워 했더니,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역사해 주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하셨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이런 분 이십니다.
한없는 사랑을 가지고 계실뿐만 아니라, 당신의 자녀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구하는 것을 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이 우주의 소유주 이십니다. 이땅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부자이십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세상은 우리의 것을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세상으로 나가면 처음에는 재미가 있느나 나중에는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리고 돌아옵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생명을 노리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불행을 노리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아버지에게는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는 곳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가 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위대하신 하나님이
첫째, 아버지가 나를 먼저 아셨습니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을 아시기 전에 그가 먼저우리를 아셨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는 나를 아셨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아버지를 알아보기 전에 아버지가 아이를 먼저 알았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모르는 부분도 아버지는 알고 있습니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아버지는 알고 있습니다.
나의 장점도 가장 잘 알고 계시고, 나의 허물도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필요한 것도 가장 잘 알고 계십니다.
나에게 있어야 할 것을 먼저 아시고 예비해 주시는 분이 아버지 이십니다.

둘째, 아버지는 나의 행복을 원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종이나 노예처럼 부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첫 번째 뜻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혼자사는 아담이 보기에 좋지 않아서 그의 행복을 위해 이브를 주었습니다.
결혼식에서 딸의 손을 잡고 들어가는 아버지의 마음에는 오직 한가지 마음밖에 없습니다.
내딸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그 마음뿐일것입니다.
우리를 이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도 똑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아버지의 곁을 떠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아버지보다 세상을 더 좋아했습니다.
아버지 보다 친구를 더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 보다 물질과 쾌락을 더좋아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힘들고 고달플때가 많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인생이 고달프고 힘이드는가?
왜 하나님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시지 않으시는가?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아버지와 함께 있을때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를 받게 됩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가까이 하지 않고, 아버지와의 관계가 잘못되면 그 자녀의 인생은 고달파 집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에돌아오자 아버지 집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용서가 있었습니다.
부요가 있었습니다.
기쁨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참으로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것은 더할수 없는 행복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더욱 가까이 하시고, 그를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