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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본받아(1)

“그리스도를 본받아(1)” (엡4:13-16) 20210411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해 감히 상상도 할수 없는 ‘영생’이라고 하는 엄청난 은혜와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몇년을 더 살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손으로 운전하면서 다니실수 있는 날은 얼마나 더 남으신것 같습니까?
몇시간 프리웨이를 운전하고 다닐수 있을 날은 몇년이나 남으신것 같습니까?

사람들은 이땅에서 하루라도 더 살고 싶어서 바둥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땅에서의 시간은 한 점에 불과한 만큼 영원한 생명이 있고, 또한 그 나라에서는 질병도 고통도 없고 평화와 기쁨만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은혜와 축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천국을 믿는 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생각의 99%는 이땅에 매여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게 하라고 하신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가야하는 천국이 생생하게 보이고 느껴진다면 이땅에 살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을 것이고 하루라도 빨리 천국에 가고 싶어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의 99%가 이땅에 매여서 살게 하신 것은 이땅에 사는 동안에는 이땅의 일에 충실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항상 그렇게 땅만 보면서 세상에 매여 살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우리의 신앙이 점점 성숙해 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충만하게 자라라고 하신 것은 나이가 들고 천국이 가까워 지면 우리의 생각이 천국의 본향을 생각해야 하고 그리고 우리의 인격과 성품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성경은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영혼구원’을 위해서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이다.. 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전도와 선교’에 대해서도 강조를 하고 있지만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에서는 ‘성숙한 인품과 삶’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의 대부분이 ‘성숙한 인격과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이 ‘죄’인 것 아닙니까?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지신 것입니다.
인간의 ‘잘못된 삶’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올바른 인격과 올바른 삶’을 반드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도’를 가로 막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멀리하고,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올바르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의 인격과 생활 때문이 아닙니까?
교우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 비난하고, 싸우고, 갈라지고 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실망을 하고, 자녀들이 실망을 하는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도 힘이 없어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요,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리고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 오늘 성경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인격’이 성장하고 완성되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영광, 하나님나라의 확장, 영혼구원의 사역을 위해서 선행되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과 생활이 일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의 발을 씻긴것 처럼 너희도 먼저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라’
하신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눈에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기는 믿는데 자기 방식대로 믿습니다.
자신은 열심히 하는데 다른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덕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알기는 아는데 믿지는 못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기적의 이야기들은 너무도 많이 들어서 다 알고 있지만 실제 자신의 삶 가운데서는 적용하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행합니다.

야곱이 루스 광야에서 하나님 음성을 들을 때
[창28:16-17]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들었던 하나님입니까?
그러나 야곱은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 형 에서를 피해서 삼촌 라반의 집에 도망하면서 혼자가 되었습니다.
황량한 사막에 혼자가 되면서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된 것입니다.

체험은 부딪쳐 봐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해 보아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 다 누려봤던 다윗이 하나님께 구하는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시27:4절 [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다윗의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다윗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치에 열을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관심이 정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에 열을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관심이 다른 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여러분을 화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관심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미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소원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그의 마음에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도 목표가 있어야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목표로 하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토마스 아켐퍼스>의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 제목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성장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가져야 하는 최고의 목표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닮아가는 것’입이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자신을 아름답게 다듬어 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흐트러 지고 더러워 졌던 우리의 생각, 정신,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분노하게 하게 만듭니다.
세상은 사람을 악하게 만듭니다.
착하게 살게 놔두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에 살면서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가끔 사람들이 ‘Sunday Christian’ 이라고 조롱하는 말들을 합니다.
주일만 성도인척하지 다른 날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조롱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도 과거에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확실하게 믿어야지 주일날만 크리스챤인척 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엄청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교회에 와서 마음껏 예배드리기 어려운 때에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더 절실하게 느껴 집니다.

지금 지구상에 80억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그중에 오늘 주일에 하나님앞에 예배드리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일주일동안 일하고 하루 쉬는 이날이 얼마나 소중한 날입니까? 이 소중한 날의 가장 중요한 낮시간을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과 정신을 새롭게 하는 시간을 매주 갖는다고 하는 것은 특별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교회에 나오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교회에 안오면 이상하게 느껴 지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어려운 큰 결심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차원이 다른 신분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다만 차원이 다른 축복을 받은 사람은 거기에 따르는 ‘책임감’과 ‘도덕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초기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주었던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자리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탄이 악한짓을 하는 것은 하늘에서 쫒겨 나서 자신이 영원히 살아야 할 장소가 가장 낮고 어두운 무저갱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속한 곳이 어두움이기 때문에 어두움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천사의 자리에 있을때는 천사 처럼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자리에서 쫓겨나서 이 세상에 떨어지니 악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자리에서 천상의 자리에 옮겨 졌습니다.
이 세상의 자리에 있을때는 형편없이 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에 앉았으니 존귀하게 살아야 합니다.

●산에 갈때 무엇 때문에 가느냐에 따라서 산에서 얻는 것이 달라 집니다.
어떤 사람은 산삼을 캐러 산에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운동을 하러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불치의 병에서 치유받기 위해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도를 닦기위해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복하기 위해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뱀을 잡으러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산에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 읽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의 지식을 얻기 위해서 읽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믿음을 얻기 위해서 읽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문제해결을 위해서 성경을 읽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르치기 위해서 성경을 읽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율법적으로 읽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얻어야 하는 데 유대인처럼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에 밝은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들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답을 줄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 보아야 할 신앙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교회봉사, 구원해야할 영혼, 다른 성도들 이전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신앙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은 신앙의 완성입니다.
신앙생활도 성숙의 목표를 알고 하는 것 아주 중요합니다.

‘온유’는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입니다.
온유하지 못하면 아무리 능력있고 열심히 해도 좋은 평가를 받을수 없습니다.

‘겸손’은 낮아지는 마음입니다.
겸손해야 배우고 성장할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가르치고 지적하는 것을 좋아 합니다.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성숙해 지지 못합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신앙생활의 연도가 많아 질수록 우리의 ‘신앙과 인격’은 완성되어 가야 합니다.
60대는 자신을 완성하는 나이입니다.
30대부터 50대까지는 자녀를 기르고, 사업을 하고 세상에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 하는 나이입니다.
60대 들어가면 자녀들도 다 커서 자신들의 길을 가고 있고,
남의 허물을 포용하고 이해하고 감싸주는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
남의 허물이 눈에 자꾸 들어온다는 것은 아직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60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성질이 남아 사람들과 싸우고 화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인생을 잘못살고 있는 것입니다.

40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60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이 만들어 져야 합니다.
온유하고 부드러운 얼굴이 되어야 합니다.
60대는 이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 나이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만큼 이루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감사하고 만족을 해야 합니다.
꼭 산 꼭대기 까지 올라서 정복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70이 넘어서 화를 내면 아무도 무서워 하지 않습니다.

●산에는 수많은 나무들이 있습니다.
산 밑에도 나무가 있고 산 위에도 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의 종류도 많습니다. 큰 나무도 있고 적은 나무도 있습니다. 부러진 나무도 있고 휘어진 나무도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잡초도 있고 바위와 돌들도 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도 있고 그 냇물속에 사는 물고기도 있습니다. 이름모를 꽃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꽃과 나무의 씨를 퍼뜨려 주는 꿀벌들도 있고 짐승들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산은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아름다운 산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산은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아름다운 산에 있는 나무 한그루 한그루 들입니다.
모두가 큰 나무가 되기를 원하지만 아름다운 산은 큰 나무만 있지 않습니다.
큰나무, 작은나무, 부러진 나무, 휘어진 나무, 그리고 풀과 잡초 있습니다.

●이 지구를 푸르게 만들어 주는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 하고 있는 것은 ‘풀과 잡초’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짐승들에게 생명을 주는 근본은 풀과 잡초입니다.
이 지구의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어주는 것은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풀과 잡초들입니다.
멋있고 아름다운 나무보다 더 중요한 것이 풀과 잡초들입니다.

젊었을때는 모두가 크고 아름다운 나무가 되는 것이 꿈이지만 나이가 들면 풀과 잡초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인생이 잡초처럼 살아 왔지만 그것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가장 소중한 역할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성숙입니다.
그리고 나이 60이 되면 그것을 깨닫기 시작해야 합니다.

●왜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야 할까요?(14절)
14절 [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함이라 ]

어린아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유혹에 잘 빠진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미숙하면 마귀의 유혹에 잘 넘어지게 됩니다.
적은 일에도 시험에 들게 됩니다.

▶잘 요동한다는 것입니다.
잘 흔들린다는 것이지요.
남의 말에 쉽게 흔들립니다. 뿌리가 얕기 때문입니다. .
마13: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 가운데 보면 ‘돌밭에 뿌리 운 씨는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는 곧 넘어지는 자’ 라고 했습니다.

● 신앙은 혼자 자랄수 없습니다
16절 [ 그에게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자수성가’ 라는 말도 사실은 틀린 말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야 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살수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른을 키운다’는 말을 합니다.
어린아이 때문에 어머니는 성숙해 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린아이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항상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어른을 보면서 배우고, 어른은 어린아이를 돌보면서 또한 배우고 서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서로」란 말이 있습니다.
신약에만 하더라도 40회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용납하라, 서로 화목하라, 서로 권면하라 서로 문안하라, 서로 격려하라, 서로 위로하라, 서로 도와주라’ 등등입니다.
‘서로 지적하라’는 말은 없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또한 ‘다른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엡4:31-32)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우리의 성숙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 그분의 인내, 그분의 충성, 그분의 모든 인격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행함으로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예수님의 향기가 나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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