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길(2) ‘잘 믿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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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길(2) ‘잘 믿는 길’

믿음의 길(2) ‘잘 믿는 길’

(히11: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잘 살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후회 없이 살수가 있습니까?

누구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까 ?

인간을 창조하시고, 우주를 창조하신 주인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대답이 성경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잘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을 돌아 볼때 제일 아쉽고 후회되는 부분이 있다면 믿음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믿음이 부족했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믿음은 목사라고 다 좋은것 아닙니다.

때로는 초신자보다 못한 믿음으로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믿음이 좋은것 아닙니다.

평생 예수를 믿었다고 믿음이 좋은것도 아닙니다.

봉사를 많이 한다고 믿음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믿음은 한번 좋다고 영원히 좋은 것도 아닙니다.

믿음도 날씨 처럼 변합니다. 화창 할때도 있고, 구름이 잔뜩 낄때도 있고, 바람앞에 갈대처럼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신앙의 길’은 ‘믿음의 길’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얼마 만큼 승리할수 있는가 하는 것은 얼마 만큼 하나님을 신뢰했는가? 하는 것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믿음은 그 마음에 하나님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이 가득한 사람은 언제나 행복합니다.

영원히 행복 할수 있습니다.

주님은 단 한순간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어떤 직업을 가지느냐 보다, 어떤 좋은 환경에서 사느냐 보다 하나님을 얼마나 잘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잘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부모 보다 훌륭한 부모가 없고, 믿음의 자녀 보다 훌륭한 자녀가 없습니다. 믿음의 지도자 보다 더 큰 지도자가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 보다 더 귀한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짧은 구절이지만 무엇이 믿음인가?

잘 믿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명확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상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90% 이상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은 믿음이 없는 생활입니다.

 

오늘 성경이 말하는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기는 계신데 어디 계신지 모르는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이 자리에 계십니다. 나와 함께 계십니다.

항상 이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잘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믿음 하나를 보십니다.

 

성경은 믿음의 책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도와 주기 위해서 기록된 책이고, 성경의 모든 이야기들이 믿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이런 믿음의 영웅들, 믿음의 금메달을 딴 사람들의 이야기 들입니다.

이들 역시 우리와 똑 같은 환경에서 살았고, 문제많고, 고난이 많은 세상에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잘 믿는 사람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첫째, 잘 믿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듭니다.

학교 다니며 공부하는 것도 힘이 들고, 사회에 나와서 일하는 것도 힘이 드는 일입니다.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은 더 힘듭니다.

많은 어려운 일들을 만납니다. 열심히 했지만 안될때도 많이 있습니다. 시험 드는 일도 많습니다.

그래서 살다보면 낙심 될때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생활도 역시 힘이 듭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다가 낙심해 있으니까 어느날 그의 아내가 장례복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루터는 아내에게 말합니까? 누가 죽었냐고, 그러니까

‘예 하나님이 죽었답니다.’

그러자 루터는 이사람이 별 농담을 다하네. 하나님이 어떻게 죽어? 말같지 않는 소리하지마… 그러자 아내가 말합니다.

하나님이 죽지 않았다면 당신이 왜 그렇게 낙심하고 있지요?

당신이 그렇게 풀이 죽어 있는것을 보니 하나님이 죽은것이 틀림이 없어요….

그 말을 듣고 루터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다시 힘을 내서 종교 개혁을 이루어 나갔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여러번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마틴 루터처럼 믿는다고 하면서도 때로는 믿음이 없는 모습으로 있을때도 있습니다.

 

세상은 좋아 진것 같은데 낙심하게 하는 일은 더 많아 졌습니다

현대를 혼돈의 시대라고 하고, 불안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불안과 공포와 염려와 긴장은 전 세계적이고, 다 같이 어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도 밤에 잠을 못자는 사람이 420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1년 동안 TV에 수면제를 선전한 광고비가 2억9800만 달러라고 합니다.

한해에 수면제가 1500만 톤, 항우울제가 1150만 톤, 진정제가 850만 톤 사용되어 졌습니다.

 

사회 보장 제도가 잘 되어 있고, 근심 걱정 없이 살수 있는 환경이 되어 있는데도 사람들은 더 불안해 하고, 잠 못이루는 밤이 더 많아 지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 입니까?

영적인 문제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낙심’은 마음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왜 마음이 무너집니까?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지 못합니다.

환경은 나빠지고 있습니다.

지하자원도 고갈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구는 점점 많아 지고 있습니다.

환경적으로는 더 좋아 질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보면 무너 집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은 신앙이 자라지도 않고, 계속 시험 드는 일만 생깁니다.

저사람은 왜 저럴까? 그게 사람인데 뭐가 이상합니까?

3%의 소금이 바닷물을 짜게 하듯이, 아주 적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성숙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게 되기 위해서 엎치락 거리며 자라고 있는 미 성숙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납해야 하는 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낙심케 하는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믿음의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한 소망이시며

무한한 능력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용기를 주고 희망을 줍니다.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을 바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후 4:8-9)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사람은 절대 낙심하지 않습니다.

 

둘째, 장애물을 넘어 갑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장애물이 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길에도 장애물은 늘 있습니다.

장애물을 만났을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음으로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중풍병자를 네 친구가 들것에 들고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에워싸 있어서 도저히 예수님이 계신 집안으로 들어 갈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네 친구는 지붕위에 올라가서 지붕을 뚫고 사람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장애물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시험들어서… 어려워서… 나 죽는다!’ 이런 생각은 절대로 안합니다.

‘산넘어 산’이라고 하지만 언젠가 새로운 평야가 오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형들이 죽이려고 합니다.

형들이 애급의 종으로 팔아 넘겨 버렸습니다.

세상에 이런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보디발의 집에 팔려 가서 열심히 일합니다. 인정받아서 그나마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또 왔습니다.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억울하게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어떤 장애물을 만나도 좌절하거나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참고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때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끝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신 꿈이 있었습니다.

하늘의 열한별이 자신앞에 무릎 꿇고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하게 알수는 없지만 자신의 형제들을 비롯해서 세상 만민이 자신 앞에 무릎꿇을 날이 온다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의 인생이 종살이, 옥살이에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은 요셉에게 평안을 주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옥살이가 요셉의 장애물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예수 믿는 다고 장애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장애물이 더 많이 생깁니다. 예수 믿지 않았으면 당하지 않을 많은 장애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장애물이라도 넘어갈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붙잡으면 넘어가지 못할 장애물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붙잡는 것이 믿음 입니다.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 수많은 고비 고비를 넘어야 하듯이

믿음의 금메달도 마찬 가지입니다.

수많은 난관을 넘고 넘어야 정상에 올라가는 것이지 그냥 올라가는 사람일 한 명이나 있습니까?

 

은혜도 고비 고비를 넘어야 됩니다.

기도도 고비 고비를 넘어야 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는 길은 쉽게 열리지 않습니다.

장애물을 넘어가지 못하면 절대로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내게 오는 모든 장애물, 내게 오는 모든 시험, 우리는 이겨낼 수 있습니다.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 장애물을 넘어가지 못해 가지고, 늘 넘어지는 분들이 많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시험 드는 일도 많습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다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 가운데도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기적은 없습니다. 할 일 다 하는 자에게, 끝까지 인내하고 노력하는 자에게, 최후에 지붕을 뚫고 내려온 그 다음에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장애물이 왔을때 그것을 한번 참고 넘어가 볼수 있기 바랍니다. 그것을 이기고 나면 큰 기쁨이 옵니다.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야곱의 일생에도 위기의 순간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얍복강에서 혼자 남아서 천사와 씨름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를 붙잡고 자기를 축복하지 않으면 절대 놓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천사를 붙잡고 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져 주신 겁니다.

야곱의 간절한 마음을 보시고 져 주신 것입니다.

‘바지 가랑이 붙잡고 늘어지는 것’ 야곱이 원조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예수를 잘믿고 기독교 역사에 가장 빠른 부흥을 하게된 것은 우리 민족은 붙잡는 문화가 발달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농담삼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농담 같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서양사람들은 그렇게 붙잡고 늘어지는 것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민족은 한이 많아서 그런지 붙잡고 늘어지는 문화입니다. 영화들도 보면 바지가랭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장면이 잘나옵니다.

 

기도도 한국사람들은 붙잡고 늘어지는 기도입니다.

산에가면 나무를 붙잡고 흔들어 대면서 기도를 합니다.

나무를 붙잡고 얼마나 흔들어 댔으면 기둥 뿌리채 뽑기도 합니다.

세상에 나무를 붙잡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한국사람들 밖에 없습니다.

 

야곱이 천사를 붙잡고 나 축복하지 않으려면 죽이고 가소

하고 기도 했던것 처럼, 한국민족은 그 야곱의 정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교회부흥이 이런 기도에서 왔다고 해서 이제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의 기도를 흉내내기 시작합니다.

통성기도를 코리언스타일의 기도라고 말합니다.

 

왜 붙잡는 문화가 생겼겠습니까?

약하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알았습니다. 자기는 못났고 , 축복받을 위인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압니다.

사람들에게 인기도 없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잘되고 싶고, 축복받고 싶은 마음은 똑 같습니다

자신의 소원을 이룰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붙잡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그 마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쌍둥이형 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키도 크고 인물도 좋습니다.

그런데 에서의 문제는 하나님에게 간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쉬운 것이 없고 잘나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사람들은 늘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4천년이 지났습니다. 야곱의 후손은 이스라엘이 되고, 에서의 후손은 아랍사람들이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주먹 만하고, 에서의 후손들은 억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에게 꼼짝을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붙잡는 사람과, 자기 힘을 믿는 사람이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입니까?

잘 믿는 사람이 잘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붙잡는 사람이 잘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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