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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길(3) 믿음의 용기

믿음의 길(3) 믿음의 용기 히11: 23-26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천국에 갑니다.

믿음으로 기적을 만들고, 믿음으로 기도의 응답을 받고, 믿음으로 축복에 이르는 것입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 입니다.

신앙생활은 믿음생활입니다. 어떤 환경에서 사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믿음으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승리한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노아가 세상이 물로 멸망당할 때 살아남은 것은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요셉이 애급으로 팔려 가서도 총리의 자리에 까지 오를수 있었던 것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모두가 믿음으로 인해서 영광의 자리에 가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험한 세상에 살면서 두려움이 없이 사는 길이 있습니까?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을 몰아내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 계시기 때문에 항상 소망이 넘칩니다.

요즘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 앞에 비판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 보다 더 잘못하느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잘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부끄러운 점도 많습니다. 그래도 예수 믿기 전보다 더 바르게 살려고

더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이전보다 나빠진 사람 있습니까? 절대 그런 사람 없습니다.

우리는 다 부족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기 전에 비하면 훨씬 더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 좋아질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는 점점 세상에서 영향력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지난 백년동안 기독교는 50%의 성장도 못했지만, 모슬렘은 500%의 성장을 했습니다.

전 세계가 모슬렘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9.11 테러가 나서 잠깐 주춤 했지만, 모슬렘은 오일 달러로 벌어들인 막대한 돈을 이슬람교를 전파하는데 쓰고 있습니다.

모슬렘이 행위가 좋습니까? 그들은 조폭과 같습니다.

모슬렘은 자기들에 대한 어떤 비판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생명처럼 떠 받는 코란에 보면 말도 안되는 모순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도 아무도 비판을 못합니다.

공개적으로 비판을 했다가는 벌때같이 일어나서 죽이려고 덤벼 듭니다. 이런 깡패같은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교는 팽창하고 있고, 기독교는 쇠퇴하고 있습니다.

모슬렘은 일년에 한달을 금식을 합니다.

해뜰때부터 해질때 까지 합니다. 해가 지면 밥을 먹고 파티를 하고 하지만 그래도 절대 쉬운일이 아닙니다.

이들은 한달동안 라마단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그들의 신앙으로 재 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일 머니가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기름값이 올라서 아우성들을 치고 있지만, 모슬렘국가들은 앉아서 돈을 쓸어 담고 있습니다.

이들이 그 돈을 어디에 씁니까?

돈을 빌려주고 모슬렘사원을 짓게 합니다.

한국도 중동에서 돈을 빌려오고, 기름을 사오면서 모슬렘 사원을 짓고 있습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우리는 모슬렘을 우습게 보았습니다.

저런 엉터리 잘못된 사상을 가지고 무슨 영향을 끼치겠나?

누가 저런 잘못된 사상을 따르겠나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 기독교의 앞마당, 아니 안방까지 차지하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기독교는 동네 북 입니다. 아무나 건드립니다.

아무나 자기 말하고 싶은대로, 맘대로 기독교를 왜곡하고 비판을 합니다.

그래도 기독교는 별 대응을 못하고 있습니다.

진짜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성경의 진리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악해지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 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1:28)

세상이 원래 그런것 입니다.

명품보다는 짝퉁이 활개를 치게 마련입니다. 명품은 구입하기가 어렵고, 짝퉁은 쉽게 구입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요, 영적인 싸움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밀리는 것은 행위가 아닙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밀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싸우고, 어둠의 권세와 싸우는 것은 믿음 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을 좇아 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왜 우리는 안됩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했습니다.

‘기도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수가 없느니라’

믿음의 사람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에서 밀리는 것은 세상과 싸우려고 하는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왜 용기가 없습니까?

믿음이 약해 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예언하고 있는 것 처럼 말세가 될수록 믿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믿음도 약해지고 있습니다.

용기가 없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용기를 줍니다.

약한 사람도 믿음이 들어가면 용기 있는 사람이 됩니다.

어린아이도, 여인도 믿음이 생기면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시절에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무시무시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로마 정부는 예수 믿지 못하게 하려고 엄청난 핍박을 했습니다.

로마의 원형극장에 성도들을 몰아 넣고 굶주린 사자들을 집어 넣었습니다. 부모 앞에서 자녀를 죽이기도 했습니다.

예수 안믿겠다고 한 마디만 하면 자녀를 살려 주겠다고 해도

성도들은 죽으면 죽었지 절대 그런 말을 안했습니다.

가장 잔인한 고문을 하고, 죽이고 해도 크리스챤들은 눈하나 깜빡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질려 버렸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독한 인간들이 어디 있나?

300년 만에 로마는 두손 들었습니다.

교회에 항복을 했습니다.

교회는 칼 한번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로마 정부 스스로가 교회 앞에 무릎을 꿇고 로마는 그때부터 기독교 국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의지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성도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용기가 어디에서 생겼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가짜라고 하면 누가 가짜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겠습니까?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신 3:22)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신 31:8)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사 43:1)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딤후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 땅에 쳐들어 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군대를 조직해서 나가 보니 골리앗이란 거인이 나와서 설쳐 댑니다.

얼마나 큰 거인인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모습만 보고 겁에 질려서 감히 나가지를 못합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 군대 앞에 까지 와서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이스라엘 하나님을 조롱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을 받는대도 아무소리도 못하고 어깨만 움츠리고 있습니다.

이때 형들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러온 소년 다윗이 이 모습을 보았습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하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다윗의 마음 속에는 의분이 솟아 났습니다.

저 곰같이 미련한 놈이 어딜 감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욕해..

너 오늘 죽었다… 그리고 돌맹이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트려 버렸습니다.

무슨 차이 입니까? 똑 같은 대상을 놓고, 이스라엘 군대는 벌벌 떨고 있었고, 다윗은 전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든 것입니까?

믿음이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이런 차이를 만든 것입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각오로 왕 앞에 나갔습니다.

다니엘은 죽이려면 죽여라 하고 평소 하던 대로 창문을 열어 놓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생명은 모든 사람에게 귀한 것입니다. 이들도 평안한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 있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무엇이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까? 믿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이들에게 용기를 갖게 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모세는 믿음의 용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그 당시 애급사회에서 노예계급이었던 히브리인으로 태어 났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이민자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히브리인들이 너무 번성하니까 애급왕 바로는 앞으로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러나 모세의 어머니는 그럴수가 없었습니다.

숨겨서 키웁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더 이상 숨길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바구니에 담아서 나일강에 띄워서 보냅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애급의 공주가 강가에 목욕을 하러 나왔다가 바구니에 담긴 모세를 발견합니다.

히브리아이인 것을 알았습니다. 애급의 공주니까 히브리 남자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 불쌍한 마음이 듭니다. 자비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살려서 기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공주의 아들로 입양이 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아닙니까

그래서 모세는 히브리인이면서 애급의 왕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히브리 사람들은 노예생활을 했지만 모세는 애급의 왕자가 되었습니다.

출세 했습니다.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런 영광을 버립니다. 이런 평안하고 축복된 삶 보다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고통 받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평안하고 안전한 곳을 찾아 갑니다.

그러나 믿음의 용기를 가진 사람들은 평안한 삶 보다는 의미 있는 삶을 택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은 평안하고 싶다고 해서 평안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타협한다고 해서 평안해 지는 것 절대 아닙니다.

처음에는 편한것 같지만 나중에는 더 큰 어려움이 오게 됩니다.

이 세상에 평안한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품만이 평안한 곳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실 때 만이 우리의 가정에 평안이 있고, 우리의 삶에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적당히 하면 인생이 평안한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을 꺼려 합니다.

교회에 붙잡히는 것을 싫어 합니다.

그래서 깊이 발을 들여 놓기를 싫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신앙생활은 보험을 드는 것과 같습니다.

보험금 드는 것이 아까워서 보험을 들지 않으면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때 아무 보상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좋은 보험, 든든한 보험을 들어 놓으면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끄떡이 없습니다. 더 좋아 집니다.

주를 위해서 헌신하고 수고 하는것 절대 손해 보지 않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기 위해서 왕자의 자리를 버렸습니다. 함께 고난을 받았습니다. 광야 40년동안 엄청 고생을 했습니다.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세가 망했습니까?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 역사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것은 안락한 삶을 버리고 주님을 위해서 일생을 바친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2004년 5월 12일 조선일보에는 한국을 떠나는 61세의 언더우드 4세의 이야기를 보도했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가슴이 뭉클 했습니다.

120년전 암흑의 땅 조선에, 언더우드목사님은 26세의 총각으로 한국으로 왔습니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혼돈의 세상에 온 것입니다. 그는 조선 땅에 발을 디디고 나서 처음 느낀 심정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언더우드가의 한국사랑은 4대에 걸쳐서 이어 졌습니다.

언더우드 가문은 120년동안 한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연세대학을 설립했습니다. 일제시대에 고종과 명성황후를 옆에서 지켜 주었습니다. 백두산 천지의 깊이를 처음 측정한 것이 언더우드 1, 2세 였습니다.

언더우드가문의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있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앉아 있을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있었던 것은 자신의 편안과 안일을 버리고 고난을 길을 선택한 용기있는 믿음의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는 넓은길을 버리고 좁은 길을 선택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불편한 삶을 선택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힘든 삶을 선택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 명예, 쾌락을 버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용기있는 믿음을 가질수가 있습니까?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겁쟁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두려워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불같은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나니 담대해 졌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광장으로 몰려 갔습니다.

그리고 담대히 외칩니다.

우리들이 죽인 십자가의 예수가 바로 메시야, 우리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용감해 졌습니다.

두려움이 없어 졌습니다. 부끄러운 것이 없어 졌습니다.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셨고, 성령이 임하니 믿음이 생기고 용기가 생겼습니다.

이들로 인해서 이땅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믿음의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세계로 뻗어 갔습니다.

그 복음이 우리에게 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장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슬렘처럼 폭탄을 가슴에 품고 달려 들어 사람들을 죽이는 그런 용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의 폭탄을 품고, 사랑으로 그들은 녹이는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품는 것입니다. 사랑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기는 남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기는 남을 살리기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인의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이 시대를 누가 책임질수 있습니까? 믿음의 용기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누가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있습니까?

믿음의 용기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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