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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길(4) “믿음의 꿈” 

믿음의 길(4) “믿음의 꿈”     히11:1-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2007년 5월28일에 켄터키주에 있는 피터스버그에는 창조박물관이 개관이 되었습니다. 이 창조박물관은 성경의 역사 그대로 지구의 역사가 6-7천년을 넘어가지 않는 다는 것을 근거로 만들어 졌습니다.

많은 진화론자들이 비판하는 시위를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박물관들은 진화론을 근거로 만들어 졌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학은 진화론을 근거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지구의 나이는 수십억년이 더 되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성경이 말하는 우주의 역사는 7천년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너무 많은 차이 때문에 창조와 과학은 첨예하게 대립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연대의 차이로 인해서 진화론과 창조론은 공존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화론은 과학적이고 창조론은 과학적이 아닌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진화론 역시 하나의 가설이요 믿음인 것입니다. 과학을 연구하는 수많은 과학자들이 창조론을 믿고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선을 발사하는 나사에서 일하는 많은 과학자들이 창조론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창조론을 믿고 있습니다.

역사이래 최고의 과학자인 아인슈타인도 말하기를 과학도 믿음에 근거해서 이루어 진다라고 말했고, 그의 인생의 말년에 기독교 신앙에 심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가장 문제가 되는 지구의 나이의 차이는 왜 생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많은 창조과학자들이 지구의 나이를 억지로 꽤어 맞추기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6일이 현재의 24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등 진화론의 나이에 맞추기 위해서 그런 추측을 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창조과학자들은 그것보다는 하나님이 태초에 우주를 창조하실 때 이미 성숙한 상태로 만드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 인간을 만드실 때도 베이비를 만들어서 자라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담은 성숙한 어른 이었습니다.

이브도 성숙한 어른 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지구와 우주를 만드실때는 이미 현재의 지구나 우주처럼 완성되고 성숙한 상태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시면서 수억년이 걸린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순간에 해와 달과 모든 별들이 우주가 지금 형태의 성숙한 상태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또 중요한 것은 지금 까지 발견된 이 세상의 인간의 역사가 6천년을 넘어가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5대양 6대주에 살고 있는 어떤 인류의 흔적도 6천년을 넘어가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역사가 기록된 이래로 어떤 짐승도 진화된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지금의 우주를 순식간에 말씀으로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 거기에 달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조’던 ‘진화’던 그것은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히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아무도 이 세상이 창조 될때 눈으로 본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신 것을 눈으로 본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눈으로 보았다고 해도 다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을 직접 눈으로 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과 3년동안 먹고 자고 했던 제자들 조차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때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엇에 달렸습니까? 믿음에 달린 것입니다.

나를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느냐?

아니면 나는 원숭이의 자손인 것을 믿느냐?

거기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손인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갈 것이요,

원숭이의 자손인 것을 믿는 사람은 원숭이를 닮아갈 것입니다. 짐승처럼 살아 갈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닙니다.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느냐? 짬뽕을 먹느냐?

그런 선택이 아닌 것입니다.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은 나의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선택입니다. 자신의 자아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날 때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갈라 놓는 너무나 중요한 선택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 하신 것을 믿는 사람들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일 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 맨 처음 고백하는 것이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믿음과 신앙의 시작이요 뿌리인 것입니다.

오직 한 분 ‘엘로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어떤 다른 신들이 옆에서 거들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를 창조하시고 이 땅에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나는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섭리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태어난 것입니다.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처음부터 내 삶은 주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주가 닦아 주셨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주가 들으시죠’

 

여러분을 만드신 분도, 이땅에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이 믿음 때문 입니다.

주일날 어디로 가느냐? 무엇을 하느냐? 이것을 결정짓는 것은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오늘 읽은 히11:1 이렇게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현재 내가 소망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요, 그리고 현재 보지 못하는 것을 볼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사용되는 ‘믿음’이라고 하는 단어 속에는 항상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함께 붙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확률을 믿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마음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 의지에 의한 확신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소망하는 것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것을 볼수 있게 만들어 주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구약성경을 살다간 믿음의 선배들의 이야기가 예로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들은 큰 기적을 체험을 했습니다.

보지 못하던 것을 보았습니다. 소망하던 것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런 기적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가져다 줍니까?

꿈이 현실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꿈은 인간이 바라는 마음의 소원입니다.

사람들 마다 마음에 소원하고 꿈꾸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꿈은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도 있고, 어떤 꿈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불가능해 보이는 그런 꿈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자신의 마음에 있는 꿈이 이루어 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이유도 그 꿈을 이루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가슴에 있는 그 꿈들이 이루어 질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힘든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지불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소원하는 어떤 꿈이라고 할지라도 이루어 질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 여정이 끝날 때 크게 웃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쁜 소식, 복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그 꿈을 이루게 만들어 주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이 그 꿈을 이루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말 자체는 이미 인간의 이성과 과학과 합리성을 초월해서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적’을 빼어 버린다고 하면 남는 것은 ‘표지’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 기록된 책입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어떤 절망도 희망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곳에는 꿈이 살아 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크게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내적인 성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인격과 성품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말씀묵상을 통해서 그리고 기도의 묵상을 통해서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서 죄를 멀리하고, 주님의 형상이 내 속에 이루어져 가는 내적인 성숙이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야 하는 것처럼 믿음도 인품도 성숙해 져야 합니다.

둘째는 외적인 역사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나의 삶을 통해서 확장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기적의 역사는 사람마다 다른 것입니다.

이 두가지는 다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것이 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내적인 성숙을 통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노력을 하는 동시에,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표적과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참 신이라고 하는 것을 만민에게 보여주는 그런 일들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11장에 나오고 있는 믿음의 선배들의 이야기는 내적인 성숙보다는 외적인 하나님의 역사, 믿음을 통해서 기적을 만들었던 그런 역사의 증거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역경을 넘어가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그런 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어느 분이 열다섯살이 되던 해 겨울,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었습니다.

나면서부터 시력을 잃었더라면 체념하고 살겠지만 눈을 뜨고 세상을 살던 사람이, 그것도 청소년때 민감한 나이에 두눈의 시력을 잃었으니 그 충격은 너무나 큰 것이었습니다.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식구들에 짐만 되느니 차라리 죽는게 났겠다 해서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형의 손에 끌려서 시각장애인학교에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에서 이분은 새로운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학교초청으로 강연을 오게 된 어느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서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네 개의 눈이 있는데 ①사물을 보는 육안, ②지혜를 터득하여 가지는 지안, ③마음으로 보는 심안, ④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영원한 세상을 보는 영안이 있다.

그러나 이 네 개의 눈을 온전히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했습니다.

대부분 한 가지씩은 부족한 시각장애인이라고. 비록 육신의 눈을 잃었어도 나머지 세 개의 눈이 밝으면 건강한 것이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모를 환희가 이 청년의 가슴에 생겼습니다.

나도 살수 있다는 희망이 마음을 채워 왔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믿음이 그 마음에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는 열망은 태산처럼 컸지만 가난은 꿈을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진로고민으로 침체에 빠져있던 1973년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 집회에 참석한 후 그의 인생은 180도 달라지게 됩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걸 느끼게 됩니다. 그전에는 비판할 것 투성이던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기 시작 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그를 대학에 보낼 형편이 전혀 되지 않았지만

그의 믿음의 꿈은 그 모든 역경을 넘어가게 만들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갑니다. 모든 편견을 극복하고 졸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유학을 꿈꾸게 됩니다.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꿈이 었습니다. 경제적으로 후원해 줄수 있는 사람도 전혀 없고, 그리고 일반사람도 하기 힘든 미국대학의 공부를 영어로 해야 하고, 그리고 학교에 다니는 것도 힘들고, 모든 것이 불가능하고 이루어 질수 없는 그런 꿈을 이분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 10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 왔습니다.

한국과 미국 여러 나라에서 밀알선교단체를 만들어 섬긴 이재서 회장의 이야기입니다.

눈먼 장애인으로 길가에서 구걸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재서회장처럼 장애를 극복하고 정상인보다 더 활발히 활동을 하면서 많은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하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습니까?

믿음인 것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그 믿음이 꿈을 이루게 만든 것입니다.

 

‘헬렌 켈러’ 여사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열한살이 되었을때 “언젠가 대학교에 가겠어요…

나는 하버드에 가겠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 였던 헬런 켈러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철없는 아이의 이야기돌 들었을 뿐입니다. 아직 학교생활도 해 본적이 없는 아이가 정상인들도 들어가기 어려운 하버드대학에 들어 가겠다고 하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 들일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평생의 선생이었던 ‘설리반’은 헬렌 켈러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공부할수 있는 길을 여러 방도로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딸이 학교라는 단체에서 상처받고 가슴 아파할 것을 두려워한 어머니의 반대는 완강했습니다.

내 쫒으려고 까지 했습니다. 설리반 선생은 부모들을 간곡히 설득해서 학교생활을 시작하게 했습니다.

설리반 선생은 헬렌 켈러와 같이 수업을 들으면서 손바닥에 강의 내용을 써주었습니다.

믿음의 꿈을 가진 헬렌 켈러와 그의 꿈을 함께 이루어 가기 위해서 평생을 헌신한 설리반 선생의 피나는 노력으로 인해서 헬렌켈러는 시.청각 장애인 최초로 하버드 대학 입학자가 되었고 드디어 1904년 우등생으로 졸업식 강단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설리번 선생님이 원하던 대로 전 세계를 돌며 장애아들의 희망이 되어주었습니다.

 

미국에는 각 분야별로 명예의 전당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프로선수로서는 그곳에 이름이 남겨지는 것이 최고의 영광입니다.

한국의 박세리선수가 골프선수들의 최고의 영광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을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전당’입니다.

성경에는 믿음으로 살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었던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이름이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될수 있었던 유일한 기준은 ‘믿음’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경은 계속 믿음으로 믿음으로..믿음으로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재서 회장이나, 헬렌 켈러 여사가 그 힘든 과정을 이겨 넘은 것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 처럼 장애로 고통받고 있는 다른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꿈과 세상의 꿈의 차이인 것입니다.

믿음은 신앙의 연조와 관계가 없습니다.

직분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목사라고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어린아이 보다 믿음이 약해 질때도 있습니다.

믿음은 항상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믿음은 세상의 날씨처럼 변하고 흔들리는 것이 또한

믿음이기도 한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의 꿈을 이루게 됩니까?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어려움과 난관을 이를 악물고 넘어가려고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사생결단의 의지를 가진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전당에 올라간 사람들은 그런

정신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징기스칸은 말을 타고 세계를 정복했지만, 우리는 믿음의 꿈으로 세계를 정복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못하면 우리의 뒤를 이어서 우리의 자녀들이 할것 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다 못하면 그 다음 세대에서 이어 갈 것입니다.

믿음의 꿈을 이루는 길은 결코 평탄하고 안전한 길이 아닙니다. 믿음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방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시험도 있습니다.

믿음이 꿈을 가진 사람은 고통을 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통의 강에 뛰어 드는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고통이 있다는 것은 고통받는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수 있는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힘들다는 것은 힘들게 살아가는 수많은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수 있는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믿음의 꿈을 가지고 역경과 눈물과 가시밭길을 넘어 갈 때 우리들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꿈이 우리 마음속에 충만할 때 우리는 열심히 일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될것입니다.

그리고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해야할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사는 것이 즐겁고, 일하는 것이 즐겁게 될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세포 세포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꿈으로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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