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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2:3-8)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개인적인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중심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하게 됩니다.

 

어머니의 출산을 통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면 그 다음에는 가정 공동체에서 성장하고 자라게 되는 것 처럼 영적인 신앙생활 역시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는 오직 ‘한가지 믿음’ 밖에 없습니다.

구원을 얻는 믿음에는 초신자의 믿음이나 성숙한 자의 믿음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그다음에 신앙이 성숙해 가는 과정에서는 ‘여러 단계의 믿음’을 거치게 됩니다.

어린아이의 믿음에서 부터 장성한 믿음이 있습니다.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는 성숙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성숙한 믿음이 더 필요한 것은 공동체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성숙한 교회생활에 대해서 하나님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배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라고 하면 교회생활은 성도와 성도의 횡적인 관계입니다.

성숙한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종적인 관계와 성도간의 횡적인 관계가 잘되어야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새로운 공동체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새로운 공동체 생활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신앙생활의 승패를 좌우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생활은 공동체의 삶속에 나타나야 합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가정이라고 하는 공동체 속에 태어 납니다.

아이가 맨 처음 세상에 태어나면 ‘가정’이라고 하는 공동체가 그를 반갑게 맞아줍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오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가 그 아이를 반갑게 환영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공동체 속에서 태어나고, 공동체속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가정 이라고 하는 가장 적고 기초적인 공동체로 부터 사회와 국가라고 하는 큰 공동체가 있습니다.

공동체의 생활을 잘하면 편안하고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공동체 생활을 잘하지 못하면 갈등이 있고 고통이 있게 됩니다.

인간의 모든 갈등이 이 공동체 생활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공동체 생활을 잘하는가 못하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속에 섞여서 살고 있지만 실제로 늘 가까이 하고 ‘희노애락’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은 소수의 사람들에 불과 합니다.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인 가정에는 아내와 남편이 있습니다.

거기에 아이들이 2-명 포함이 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께 있으면 두사람이 더 포함이 됩니다.

요즘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사는 경우는 매우 적습니다.

일반적으로 4명 정도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가정 공동체는 혈연으로 맺어졌고, 가장 가까운 공동체입니다.

그런데도 시끄럽습니다. 그 적은 공동체, 혈육끼리 모인 공동체안에서도 마음을 맞추지 못해서 갈등하고, 번민하고, 고민하고, 고통받고, 울고불고 하는 일들을 보게 됩니다.

 

절친이라고 하는 가까운 친구도 몇 명 밖에 되지 않고, 교회에서도

마음을 나눌수 있는 사람은 몇 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10-20명 안팎의 사람들과 아웅다웅 다투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 입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소수의 사람들이고,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도 가까이 있는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두가지의 모순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공동체속에서 살고 싶어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이든지 그 속에 석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공동체속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욕구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상반된 속성이 늘 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혼자살면 외롭고, 둘이 살면 괴롭다. 그러나 외로운 것 보다는 괴로운 것이 낫다“는 말들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행복은 공동체 생활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특히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교회라고 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하나 더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는 우리의 가정과 사회를 살려주는 역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안에서 성숙한 생활을 할수 있는 사람은 가정 공동체, 직장 공동체, 사회 공동체에서도 성숙한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숙한 공동체의 삶을 살수가 있습니까?

첫째, 공동체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태초에 인간인 아담은 하나님과 공동체를 이루어 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아서 이브라고 하는 여자를 만들어서 가정이라고 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그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브가 문제를 만들었습니다.

에덴동산이란 공동체에는 하나님과 아담과 이브 세사람이 구성원이었는데 이브가 또 다른 존재를 자기 마음대로 받아 들인 것입니다.

사탄을 그들의 공동체 안에 허락한 것입니다.

사탄은 감언이설로 인간을 유혹하고 더 멋있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 줄 것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을 그들의 공동체에 용납한 인간은 곧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빛은 떠나고 어두움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빛의 공동체가 어두움의 공동체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사탄의 노예가 된 인간은 죄와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구원은 공동체의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용납한 사탄의 세력을 공동체에서 몰아내고 하나님을 공동체의 왕으로 다시 모시어 들이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우리 공동체의 왕으로 모시어 들이는 예식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신앙생활의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가정의 왕으로 섬김니다.

직장에서도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예배는 축복받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자녀가 잘 되고, 사업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나의 공동체에 왕으로 모신 것을 감사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로 따라오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의 왕이 되어주심으로 인해서 가정이 행복하고, 자녀들이 은혜가운데 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업의 주인이 되어 주심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사업을 책임져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성숙한 공동체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마땅히 생각할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신앙공동체의 생활을 하는데 첫 번째 장애물이 되는 것이 이것인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을 제일 먼저 주시고 있습니다.

‘마땅히 생각할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라고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자신을 알고 분수를 알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자신을 바르게 평가하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기에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격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영어 번역으로 보면 ‘자기 스스로 교만하게, 또는 자랑하는 존재로 생각지 말라’고 표현하고 있고, 헬라 원문에는 생각할 바 그 보다 높이 생각하지 말고 또한 낮추어서도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나 자신을 몇점으로 평가 하면 좋겠습니까?

후하게 생각해서 한 70점으로 평가 했다고 합시다.

이 점수는 내가 생각한 나의 평가이고 실제의 내가 50점 짜리이면 이 차이인 20점 만큼 고민이 있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평가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다른 사람을 온전히 평가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오직 우리를 온전히 평가를 하실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 십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도 온전히 평가를 할수 없고 다른 사람도 온전히 평가를 할수 없기 때문에 늘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보다 더 높게 평가를 하든지 아니면 더 낮게 평가를 하게 됩니다.

그 차이 만큼 갈등을 하게 됩니다.

 

사실 그대로 평가하고 평가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지만 인간들은 실제보다 높이 평가해 주기를 바라고 기대합니다.

 

자신을 바르게 평가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바르게 갖지 못하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다 할수 있다는 생각도 잘못이며, 또 무엇이든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 즉 마땅히 생각할 만큼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존재이며 현재도 그 분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실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셨는데 내가 나를 정죄하고 있다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나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도 용서했으니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미 용서했다는 확신속에 감사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 성숙한 믿음은 내가 속한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완전한 조직과 질서를 갖추어진 공동체 입니다.

손이 발보다 귀한 것이 아니고, 또 못한 것도 아닙니다.

지체마다 모두가 몸을 위한 것이기에 어느 것 하나도 버릴것이 없으므로 절대적으로 귀한 것입니다.

 

6.25 때 어느 군인이 인민군에 끌려 갔는데 부상을 당하면 후방에 실려갈수 있을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몸의 어느 한 부분을 상해해 보려고 살펴 보았더니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 그 어느 것도 자를게 없어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손은 손대로 중요하고 발은 발대로 중요하며, 코의 할 일이 있고, 귀의 할 일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 더 귀하거나 더 좋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처럼, 우리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귀한 지체입니다.

 

우리가 늘 생각해야 하는 사실은

첫째,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요 우리는 모두 한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 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가치를 귀하게 생각하는 것 처럼 상대방의 가치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꼭 필요한 사람인 것 처럼 , 다른 사람도 꼭 필요한 사람인 것을 인정해 주어야합니다.

 

둘째, 지체의 특징은 상호 보완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 몸의 지체도 서로 서로 도움으로 인해서 같이 공존해 가는 것입니다

 

손과 발은 일함으로 인해서 다른 지체를 도와 줍니다.

눈과 귀는 보고, 들어 줌으로 인해서 손과 발을 도와 줍니다.

 

공동체 안에 필요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고 각자의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셋째, 지체는 서로가 다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것과 틀린 것을 잘 구분을 못할때가 많습니다

자기의 생각과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생각할때가 많습니다.

 

공동체 생활속에 분쟁이 생기는 많은 이유가 이런 것입니다. 다른것과 틀린 것을 구분을 못하는 것입니다.

지체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다 틀린 것은 결코 아닌겻입니다.

 

다저스의 마이크 피아저 선수가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다저스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 외국선수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 었습니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고, 문화가 다름으로 인해서 화합이 안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말이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났습니다. 논쟁이 붙었습니다. 오히려 그말로 인해서 팀의 분위기가 더 나빠졌습니다.

 

넷째, 지체중에 반드시 약한곳이 있습니다.

고린도서에 보면 약한곳이 더 귀하다고 했습니다.

지체중의 한 부분이 병이 날때가 있습니다. 제 역활을 하지 못하는 지체가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같이 고통을 당합니다. 그리고 그 지체가 고침을 받기 위해서 다른 모든 지체가 도와주는 것입니다.

 

현대사회는 공동체의 개념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개인주의 적인 사고 방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개인주의는 공동체의 유익보다 자신의 유익을 먼저 추구하는 사상입니다.

인간은 공동체를 떠나서는 행복을 찿을수가 없습니다.

 

성숙한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현재의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 들이는 사람입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마지막으로 공동체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법과 질서는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법과 질서는 우리를 얽매이기 위해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유지하고 서로의 유익을 위해서 만들어 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생각과 사상이 다릅니다.

모든 사람들의 취향이 다릅니다.

각자 자기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 공동체가 유지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편하더라도,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자기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그 공동체의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 양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양보는 결국 자기를 위한 양보입니다.

모두를 살리는 양보입니다.

 

지체는 서로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하고, 아내는 남편을 위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하고, 자녀는 부모를 위합니다.

형제는 자매를 위하고, 자매는 형제를 위합니다.

목사는 교우를 위하고, 교우는 목사를 위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은 성도를 위합니다

 

자신의 유익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위하는 것이 성숙한 성도입니다.

 

우리는 한국민족이지만 미국국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민이라고 하는 것은 그 나라 사람이 된다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한국 민족이지만 미국국민입니다.

미국은 합중국입니다.

전세계 모든 민족이함께 살아가는 합중국입니다.

51개주가 합해있고, 전세계 100개 이상되는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나라입니다.

 

미국이란 나라는 그렇게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지체의식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더 강한 곳이 미국입니다.

 

우리 한국민족이 미국에와서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고, 학교에서도 뛰어난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민족들에게 한인들이 호감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민족인데 왜 환영을 받지 못합니까?

 

미국속에 융화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무 한국적인것만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 일하여야 하는 천국 시민이요 ,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주셨습니다.

성숙한 성도의 삶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참 기쁨이 있습니다.

그때 인생의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남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마음이 다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마음이 다 있습니다.

 

문제는 조금 하다가 중단 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위하다가 돌아오는 것이 없으면 중단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끝까지 해야 좋은 열매를 맺을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십시다.

끝까지 사랑하고, 끝까지 인내하십시다

반드시 열매를 보게 될것입니다.

분명히 좋은 일이 생기게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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