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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마16:15-20)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땅에 태어나게 하실 때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태어나게 하십니다.

가정의 보호를 받고, 가정에서 인격이 만들어 지게 되고, 가정에서 인생을 배우게 됩니다.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면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보호를 받고, 신앙을 배우게 되고,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코로나’가 시작이 되고 나서 전 세계적으로 ‘교회’가 제일 많이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종교단체들이 많은데 유독 ‘교회’에 대해서는 더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은연중에 ‘교회’는 특별한 곳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사람들이 유달리 ‘미국’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와 비슷할 것입니다.

 

과거 여학생 두명이 미군의 탱크에 치어 죽은 일이 발생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일어나 미국을 비판하며 나라가 뒤집어 질 정도로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연평도에 대포를 쏘아 대고, 천안함을 공격해서 수십명의 군인들이 죽어나가도 촛불은 커녕 성냥불도 키지 않습니다.

 

그다음에는 ‘미국산 소고기’에서 ‘광우병’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또 ‘촛불’을 들고 난리를 친 적이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식탁은 중국산 음식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동안 중국산 식품에서 온갖 오염된 것이 신문에 여러번 보도가 되기도 했습니다.

과거에 그렇게 ‘광우병’ 난리를 치던 사람들은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본, 중국, 러시아로 부터는 그렇게 고통과 피해를 보았고, 북한 때문에 나라가 두동강이 나고 수백만이 이산가족이 되었습니다.

미국보다 이루 말할수 없이 나쁜일을 하고, 한국에 끔찍한 피해를 주는 중국에 대해서는 아무소리 안하면서 유독 미국에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난리들을 치는 것일까요?

그 뒷면에는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부축이는 이유도 있겠지만 일반 사람들도 그렇게 미국에 관련된 일에 대해서 과민한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특별하게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국에 대해서 그만큼 기대를 많이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교회도 마찬 가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 교회는 다른 어떤 종교들 보다 좋은 일을 많이 합니다.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세워진것도, 여성들이 남성들과 같이 대우를 받게 된것도 교회의 영향이 큽니다.

그러한데도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더 비난합니다. 그 비난의 배경속에는 교회를 더 특별한 존재, 자신들도 모르게 교회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지옥은 마귀에게 속한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음부로 끌려가게 됩니다.

음부는 사탄과 마귀를 가두기 위해서 준비된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탄에게 속해서 살던 사람들이 함께 가는 곳입니다.

그 음부의 권세, 사탄의 권세를 이길수 있는 유일한 힘을 가진곳 그곳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는데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이 반석위에 교회가 세워질때 음부의 권세가 흔들지 못하고 튼튼하고 건강한 교회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반석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첫 번째 반석은 바른 신앙고백입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시니이다

‘고백’이라는 말은 나의 믿음을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믿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배 드릴때 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무엇을 믿는가? 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사람들은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3절)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은 후 그는 다시 물으셨습니다.-“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절)

이때 베드로는 그 유명한 대답-“주는 곧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이 고백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라 믿느냐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핵심인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 이 한마디에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모두 포함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문자 그대로 ‘기름 부으심을 받은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만이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왕은 다스리는자요, 선지자는 가르치는자요, 제사장은 죄의 해결자 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 당신만이 나의 왕-나를 완전하게 다스려 주실수 있는 분이시며, 당신은 나의 참된 선지자-나를 온전한 진리로 가르칠수 있는 분이시고, 당신은 나의 제사장-곧 나의 죄와 인생의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믿습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 모든 내용을 두 단어로 요약하면 “구세주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바로 교회의 반석인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교회인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나를 죽음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나를 지옥의 권세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힘들다면 지옥은 그보다 천배, 만배 더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그 지옥에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삶은 잠깐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은 따로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하시는 구원자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현실의 문제에 너무 집착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천국과 지옥을 알지 못해서 그렇다고 쳐도, 크리스챤은 다가올 천국과 지옥의 심판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현실의 문제에만 매달려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실이 중요합니다. 현실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할 천국을 생각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는 다면 우리는 인생을 잘못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가올 지옥의 심판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심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의 가정도, 여러분의 자녀도, 여러분의 건강과 재물의 주인이 예수님이시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재능과 시간과 재물과 모든 것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써야 한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도, 봉사를 하는 것도, 헌신을 하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인 것입니다.

 

고백이 말로만 하는 것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고백은 그 삶자체를 바꿔 놓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백대로 사는 것이 진실한 고백인 것입니다.

 

결혼 할때는 서로에게 고백을 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죽을때 까지 당신만을 사랑하고, 당신만을 아끼고, 건강 할때나, 아플때나, 좋을때나, 힘들때나 영원히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고백은 그렇게 해 놓고 막상 살다가 힘든 일이 생기면 내가 언제 그랬냐? 자신이 말한 것을 지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백한 대로 지킬수 있는 사람들이 될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사람이 자신의 말한 것을 다 지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지키려고 해야 하고, 지키지 못할때는 미안하게 생각이라도 할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때부터 새벽4시에 일어나 공부했습니다. 부모님이 그렇게 강요한것도 아닙니다.

새벽에 공부도 더 잘될 것 같아서 함께 방을 쓰는 할머니에게 깨워 달라고 한 것입니다.

중학교때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면서 가정이 아주 어려워 졌습니다.

식구들은 먼저 서울로 이사를 가고 할머니와 부산에 남아 있을 때 친구들과 일년동안 학교 끝나고 매일 축구만 했습니다. 그것도 중3때 였습니다. 그렇게 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고등학교입학시험을 보니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1년 재수를 했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가정을 살려야 겠다 생각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야겠다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친구들이 당구장에 가도 저는 당구장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명절이나 때로 모이면 화투치는 것도 끼지를 않았습니다.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것도 절제를 했습니다.

왜요? 미국에 유학을 가야하니까..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흐트러지면 안되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미국에서 나를 부르는 것도 아니고, 미국에 아는 사람이 있는것도 아닌데 미국에 유학가는 길만이 출세하는 최고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를때도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렇게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목표나 신념보다 더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소명’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

 

개인의 목표를 위해서도 흐트러지면 안되는데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더 철저하게, 흐트러지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의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절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절제’하는 것입니다.

‘절제’는 자신을 철저하게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맞추는 것입니다.

 

‘고백’은 결심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겠습니다. 라는 결심이요 결단입니다.

고백은 한번으로 다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배때 마다 똑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잘 변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고, 변함 없는 고백이 될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우리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 바울의 글을 보면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 ‘은혜’입니다.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잘못된 길로 가지 않습니다.

 

바울이 바울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늘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그렇게 핍박을 받으면서도 마지막 까지

신앙의 길을 지킨 것은 은혜를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녀, 부부사이, 스승과 제자, 친구와 친구 사이 모든 인간관계가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잊어 버리면서 부터 모든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아브라함이 그 당시 가장 위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내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내실때 아브라함은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아브라함보다 훨씬 나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욥’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욥도 아브라함과 같은 족장시대의 사람 이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동방의 의인 이었다고 했습니다.

동방에서 최고의 부자요, 최고의 의인이었습니다.

온갖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치 않고, 믿음으로 인내해서 갑절의 축복을 받았던 사람 이었습니다

 

욥의 믿음과 아브라함이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날때의 믿음을 비교해 보면 욥의 믿음이 더 나았습니다

집안으로 보아도 욥의 집안이 훨씬 나았습니다.

욥은 동방의 갑부요 지도자 였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아브라함은 우상을 만들어 파는 서민 출신입니다

집안적으로도, 믿음적으로도 아브라함은 욥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당시 최고로 축복 받은 욥을 축복의 근원으로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의 근원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욥을 택하지 않고, 아브라함을 택하셨을까

 

어느분이 이 문제를 놓고 오랬동안 연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답을 얻었습니다.

그의 답은 ‘모르겠다’ 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왜 하나님은 더 믿음 좋은 욥을 택해 믿음의 조상, 축복의 근원으로 삼지않고, 아브라함을 택해 믿음의 조상으로 삼아 주셨는가? 그것은 ‘오직 은혜’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우리들 보다 훌륭한 집안,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놔 두고 부족한 사람들을 택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 주신대 대한 우리가 할일은 그저 감사 하다는 말밖에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성된 믿음을 가진 사람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훈련시켜서 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을 가진 사람이 훌륭한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훌륭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이 아니고 적은 믿음을 크게 보이게 하는 하나님이 위대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처음 로켓트를 타고 달나라를 갔다오고 난후 ‘닐 암스트롱’은 영웅이 되었습니다.

가는 곳 마다 환영 퍼레이드가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사실 영웅시 되고 대접 받아야 될사람은 달나라 갔다온 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은 그들을 달나라로 다녀올수 있게 로켓트를 만들고 모든 계획을 세운 사람들이 더 위대 한것입니다.

그러나 조명은 우주선원들이 조명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축복의 근원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의 믿음을 위대하다고 합니다.

다윗의 믿음이 위대하다고 합니다.,

다니엘의 믿음이 위대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명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그들이 영광받을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신분도 하나님이시요, 그들에게 믿음을 주신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영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홀로 우리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분 만이 위대 한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제 2, 제 3의 아브라함을 만들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제2,제3의 다윗과, 다니엘을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이라도 아끼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드렸더니,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을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를 드리면 열을 주고, 백을 주는 하나님이시요, 둘을 드리면 천을 주고, 만으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하나님 앞에 드리면,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너무 너무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것이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아브라함의 자리에 우리도 앉혀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떠나라고 할때 떠나고, 버리라고 할때 버리고, 참으라고 할때 참고, 순종하라고 할 때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그 위에 축복을 내려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어촌에서 매일 물고기 잡으면서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인생을 주님에게 드리고 가장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신앙고백의 반석은 사랑입니다.

(요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말씀’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공부, 제자훈련을 하면서 말씀을 많이 강조합니다. 신앙생활은 말씀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말씀을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가운데 ‘최고의 말씀’은 ‘사랑’ 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모든 말씀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완전하게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고백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말만 했지 예수님이 십자가 달리실 때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왜 실패했겠습니까?

자신의 고백을 온전히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베드로의 또 다른 고백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또 질문을 하셨습니다.

첫 번째 질문이 베드로의 생각을 물은 것이라면, 두 번째 요한복음의 질문은 베드로의 마음을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의 마음, 가슴에 물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의 질문이 아니라 관계의 질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에서 주님의 사랑을 느낀 것입니다.

아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구나. 주님은 나를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구나..

베드로는 배신자인 자신을 찾아와 주신 주님의 모습 속에서 그리고 주님의 질문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대답합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지식적인 고백에서 관계의 고백으로 바뀌었습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사랑의 고백을 한 다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역의 대상은 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 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고, 돌보고, 섬기고, 위로하고, 감싸주고,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직분자들이 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교회는 가장 큰 사랑,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이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사랑을 실천하는 곳입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 교회도 시작을 할 때 제일 강조한 것이 첫 번째가 ‘사랑의 실천’ 이었습니다.

 

제가 목사안수를 받을 때 담임목회를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목사가 되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담임목사가 되는 것도 생각하지 못했었고,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목사가 되기는 되지만 앞에 나서는 것도 싫어 하고, 특히 말을 하는것도 싫어 하고, 사람들과 사교적인 것도 아니고,, 재주는 이것 저것 많으니까 뒤에서 돕는 부목사 역할이 나에게 제일 맞는 일이다 생각하면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을 달랐습니다.

담임목사가 되게 하셔서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이 결혼해서 자녀를 가져봐야 어른이 된다고 하는 말 처럼 담임목회를 하면서 진정한 교회가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가정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자녀들이 모여 있는 가정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우리의 교회생활, 신앙생활은 더 행복해 질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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